생각 관리 하기
유향의 동산
2012-06-02 , 조회 (62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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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생각'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영을 좇아 행하라' 라는 신약의 결론적인 명령을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를 주님 앞에서 추구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

3권을 읽으면서 생명의 성숙이나 영을 따라 사는 삶(갈5:16)이 우리의 '생각'과 매우 많은

관련이 있는 문제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생각을 피동적인 위치에 두지 말라'는 조언이

저의 오랜 잠을 깨웠습니다. 오늘은 이 생각의 문제를 좀 다뤄보려고 합니다.

 

1.

 

저는 천재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해야 하겠다고 작심한 것은 다 기억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로 중학교 때 그랬습니다. 그 때는 제가 저건 기억해야 하겠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중을

해서 들어 두었습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생각을 사용합니다. 그럴 때는 앞 머리 이마 쪽이 뜨뜻

해지고 입력되는 정보들을 제가 취사선택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아예 관심을 끊어

버리는 적극적인 결단이 함께 작용했던 것이 회상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빈 방에 누워서 그날 국어 시간을 회상해 봅니다.

그러면 국어 선생님이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 오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몇 발자욱을

떼어 교단으로 올라 오고 출석부를 펴서 1번 아무개, 2번 아무개....60번 아무개를 부른 다음

(이 이름들이 다 회상이 됨) 국어 교과서 몇 페이지를 펴고 읽었는데 그 책 왼쪽 첫 줄에 무엇이

쓰여 있고 그 다음 줄 그 다음 줄...맨 밑줄까지 끝나면 이제 오른 쪽 첫 줄...이런 것이 다

눈 앞에 마치 책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회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리 길을 걸어 오면서

중간 쯤 어떤 가게 앞을 지날 때 틀어 놓은 라디오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생각이 나고... 그러나 제가 저런 것 나와 무관하니 알 필요없다 싶어서 집중해서 듣지 않은

것은 생각이 안 납니다. 아니 생각도 안 해버립니다.

 

이런 일은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 할 무렵 막을 내렸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생각해야 할 것이 갑자기 불어 났고 그 당시 몸도 허약해져서 생각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눈에 들어 오는 대로 외부 정보들을 거의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는 습관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러 길 근 30여 년...그러나 아주 최근에

그런 <저의 피동적이고 느슨한 생각 관리>가 <영적 생활의 승패>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정신이 퍼뜩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부 정보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생각

하여 받고 차단하는 기능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다시 앞 이마가 뜨뜻해 지는 느낌입니다.

 

2.

 

생각 관리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들이 머리 위로 지나 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서울 노량진 쪽엔가 가면 상수도 정수장이 있었습니다.

그 정수장 안으로는 대개는 정수가 필요한 '오염된 물'(?)이 흘러 들어 들어옵니다. 아마

상류 쯤에서 처음엔 맑은 물로  흐르다가 도심을 지나면서 차츰 오염이 된 물로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일단 정수장 안으로 들어 온 물이 밖으로 나갈 때는 맑은 물만 나갑니다.

이것이 한 원칙입니다. 즉 정수장 안에서 여과 장치로 거르는 과정이 우리의 생각 내에서 이뤄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가능하면 더러운 물이 우리 생각 속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생각을 관리하는 것도 한 원칙입니다.

 

야고보서 3장 11은 '어찌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3:11)라고 말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이것이 우리 안에서 나가는 말과 관련이 있음을 알았지만

아니 사람이 살다보면 어떻게 단물에 해당되는 말만 할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타락한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가능하면 '맑은 물'만을 안에 받아 들이도록 분별력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우리 생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 저거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정보구나 그렇다면 저것은

신경을 끊자(천연적인 호기심을 잘라 버림)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더러운 생각들도 있는지라  이러한 '유입'에 대한 통제 만으로는

'맑은 물'만 흘러 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것들을 '말'로

밖으로 내 보낼 때는  '생각' 안에서 정수 작용을 거치는 2차 잠금 장치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생각을 잘 관리하다보면 우린 단물과 쓴 물을 교대로 내는

샘에서 어느 새 단물만 내는 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물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제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아침에 '영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생각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님 앞에서 묵상 할 때

다음 두 가지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빌립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입니다.

 

빌립은 천사를 통한 주님의 인도를 따름에 있어서 생각으로부터의 저지나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8:26-27은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 하되, 일어나 남쪽으로 나아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하니 그 길은 사막이더라.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보라 이디오피아 사람 곧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그녀의 모든 국고를 맡아

큰 권세를 가진 내시가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라고 적고 있습니다.

 

빌립은 '아니 왜 제가 사막으로 간대요? 무엇 때문에 저를 그리로 보내시는지 들어보고

가도 가겠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냥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라고 적고 있

습니다. 빌립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방향을 '어쨌든 믿고 가 보자' 쪽으로

정했을 것입니다.  

 

빌립의 사례보다  2 장 뒤인 사도행전 10 장에 소개된 베드로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하늘이 열리며...큰 보자기 같은 그릇 하나가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니 그것이 땅으로

내려 오더라...그 안에는 땅에 있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

짐승이 있더라. 또 한 음성이 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그 까닭은...'(행10:11-14).

 

베드로의 생각은 좀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달고 감히 주님의 명령을 일차 거절하기

까지 하는 대담성을 보입니다. 역시 베드로 답습니다. 위 두 사례는 아무리 신령해도 '생각'

안에서 주님의 인도에 기꺼이 동역함이 없이는 주를 따름에 장애를 가져 오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우리 생각의 통제와 동역이 매우 중요합니다.

 

4.

 

우리의 생각은 많은 때 주인없는 빈집처럼 방치 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도 어떤 때는 차를 타고 가다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 들어오는 이런 저런

정보들을 별 생각이 들음으로 그대로 자신 안에 유입되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들어 온 정보는 제 뇌리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제 입을 통해 흘러

나가는 것을 봅니다.

 

만일 자기 집 안방에 흙 강아지가 갑자기 뛰어 들어온다면 아마 길겁을 하고 때려서라도

즉시 내어 쫒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의 방엔 많은 때 개도 소도 지나 가다가 흙 발

자국을 남겨도 '문 빗장'도 없고 '저리가 !' 하는 한 마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래 저래 유입된 정보와 자료들이 성령의 전인 성도들을 더럽히는 구정물로

힌 옷을 더럽히는 깜북이 가루로 귀를 더럽히고 생각을 더럽히는 기름찌거기로  우리 입의

말을 통해 그냥 흘러 나가 버립니다. 그러고도 그것이 거룩한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

는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신의 간증에 어떤 타격을 가했는지에 대해 전혀 감각도 없이

그런 일이 반복됩니다.

 

5.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차적으로는 대적 사탄 때문입니다. 

그리고 2차 적으로는 생각을 피동적으로 방치한 우리 책임입니다.

날아가는 새가 우리 생각에 새똥을 싸도 비키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것은 어리

석은 것입니다. 대적이 '더러운 구정물'을 슬쩍 방류해도 즉시 입구를 차단하지 않고

그대로 그 썩은 물이 하루 종일 자기 안으로 유입되도록 자신의 생각의 문을 수동적으로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보냅니다.

 

 생명을 공급하지 못하고, 우리의 육을 자극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롬13:14) 하는

모든 정보들은 우리 생각 속으로 들어 오려고 할 때 능동적으로 선별해서 가려내야 할 것

입니다. 그래도 부득이하게 들어 온 정보는 우리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마땅히 통제를 가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말만 해 내어야 마땅합니다.

 

6.

 

저는 '그영을 따르는 자들은 그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라는 말씀에 큰 자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영을 따라 살았는지 여부는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는가'를 되 돌아 보는 일은 쉽게 파악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육을 따라 산 사람이 영의 일을 생각할 수가 없고 영의 일을 생각한 사람이

육을 따라 살수가 없다>는 점은 하나의 원칙으로 붙들만 합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말

해서 영을 따라 살려면 어찌하든지 <영에 속한 생각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보통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생각을 피동적인

위치에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 갑니다. 아니면 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에 생각을 과도하

게 사용함으로 영에 속한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뚫어

낼 것인가 하는 점을 진지하게 고민하다보면 <생각>에 대해 우리가 더 성경의 빛 가운데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필요에 대해서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3권을 적극 추천

합니다.

 

 주님은 지금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건축 중이십니다.

 

그런데 음부의 문들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나오는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없는 말들

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어떻게 건축되는가? 우리 입에서 나오는 생명을

흘러 보내는 신언을 통해 건축됩니다(고전14:4). 그렇다면 이 둘은 결국 우리의 말의 내용에

의해 좌우 되며 우리의 말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롬 8:6이 지적하듯이 우리의 생각관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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