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생생하고 영과 생명이 있는 신언의 필요
**하나님의 정하신길**
2012-07-31 , 조회 (430) , 추천 (0) , 스크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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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명의 회중을 가진 한 목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목사는 탁월한 설교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의 회중은 그의 말에 싫증을 낼 것이다.
처음 온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때 그의 설교가 탁월하다고 말하지 모르지만,
그 회중에 오래 전부터 있어온 사람들은 그의 말에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그이 말에 싫증을 내고 지루해한다.
결국 한 사람이 말하는 실행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 사람의 말은 신선함을 잃게 되고 도리어 식상해진다.
한 사람이 말하고 나머지 사람은 듣는 실행은
사람이 만든 길이고 천연적인 길이고 인간 사회의 관습에 따른 길이다.


...설교자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역량이 있을지라도,
그의 말은 모든 성도들의 말보다 풍성할 수 없다.
교회 집회에서 오직 한 사람만 말할 때, 하나님의 풍성은 충만하게 나타날 수 없다.

<교회의 사무>라는 책에서 니 형제님은
우리 모두가 힘을 다해 이 전통적인 실행을 끝내야 하고,
끝내도록 힘을 다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것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은사있는 한 사람이 말하고 나머지 사람은 듣는 집회는
사역 집회로 간주될 수 있다.

성경에는 물론 이러한 종류의 집회가 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드로아에 칠일 동안 머물렀을 때,
주일 날 바울은 그곳에서 한반중까지 성도들에게 말하였다.
잠을 이기지 못한 한 청년이 삼 층에서 떨어져 죽어 있었으나,
바울이 내려가서 그 청년을 다시 살렸고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드로아에 있던 그 집회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특별한 집회였다.
나는 바울 이외에 그 누구도 그렇게 길게 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반드시 사도 바울이나 다른 은사 있는 형제들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짧고 생생하게 신언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영과 생명 없이 다만 우리의 의무를 다하려고 말한다면,
우리의 말은 다만 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언할 때 우리의 말은 그 영과 생명이 충만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어떻게 해야 말을 잘하는지를 배우고
심지어 웃기는 말을 어떻게 애야 하는지를 배운다.

우리는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데에는 부담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이 영과 생명의 말이기를 원한다.

믿는 이로서 우리는 모두 반드시 신언을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전진 -제6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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