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흘려 보낸다는 것은
생명의봉사♤
2012-11-01 , 조회 (69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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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메시지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킬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얻게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성경을 해설하는 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입맛을 갖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분배하지 못할 수 있다.

그 반면에 집회에서 어떤 형제들의 간증은 언변도 뛰어나지 않고
미사여구도 없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지만
듣는 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인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 안으로 은밀하게 들어오셔서
그들의 깊은 곳을 만지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흘려 보낸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편, 어떤 형제가 집회 중에 일어나 말씀을 전할 때,
분명한 목소리와 유창한 언변으로 청중들의 주의력을 모으면
그들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듣고 난 뒤에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그 메시지는 마치 영감이 없는 음악과 소리 나는 징과 같다 (고전13:1).

그래서 소리가 난 뒤 어떤 것도 사람들 안에 남아 있지 않고
생명에 속한 어떤 것도 사람 안에 남아 있지 않다.

당신이 어떤 사람 앞에 가면, 비록 그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당신은 당신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며,
당신의 느낌을 만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때 만약 당신이 육체를 따라 살고 있다면 그가 당신에게 준 느낌은
당신의 육체를 만지고 책망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죄악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가 당신에게 준 느낌은 반드시 당신의 그 죄악과 세상을 만질 것이고,
그 죄악과 세상을 책망할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록 그가 당신에게 많은 말을 할지라도 어떤 말도 당신 안에 남아 있지 않고
당신의 느낌을 만지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말들은 공허하고 전혀 쓸모가 없는 말과 같다.

전자는 당신에게 권하는 말은 없지만
단지 당신을 접촉하자마자 당신의 어려움을 해결된다.
후자는 비록 많은 말이 있고 성격의 많은 말씀들을 인용했지만
당신 안에서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두 종류의 상황에서 다른 점은,
한 사람이 말에 구변이 없다 할지라도 생명을 분배하고 흘려 보내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비록 많은 말을 하나 생명을 흘려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일은
생명을 흘러 보내는 것이고 생명을 분배하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영 안에서 굶주는 것은 육체의 굶주림보다 더욱 고통스럽다.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의 집회에서 사람들은 영 안에서 괴로움을 느끼나,
어떤 지방에서는 성령의 임재를 느낀다.
이것은 전적으로 생명의 흐름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교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람에게 영적인 일을 깨닫게 하는 길은 안에서 생명을 만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영적인 일을 교리적으로 만지는가,
생명으로 만지는가이다.
한번은 누가가가 한 형제에게
"구원받은 사람도 어둠 속에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형제는 "오늘 당신은 빛 가운데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머리로 교리에 대해 물었지만 그 형제는 오히려 생명으로 대답하여
그 사람 안의 느낌을 만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교리와 생명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께 유용하게 되는 길, 제3장에서]

생명,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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