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이스라엘 탐방(5)- 통곡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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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8 , 조회 (218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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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chch.kr/comm/26231.html

[지방교회] 이스라엘 탐방(4)- 통곡의 벽

통곡의 벽(Wailing Wall) - 서쪽 벽(Western Wall)

 

마태복음 24: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입니다.

1. 솔로몬의 성전은 주전 10세기에 성전산 꼭대기에 세워졌고,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제 2성전(스룹바벨 성전)은 4년 만에 완공되었다(주전520-516). 그러나 빈약한 성전이었다. 주전 37년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에돔 족속의 후손 헤롯대왕은 주전 20년부터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건축을 시작하였지만 이 확장공사는 헤롯 대왕의 증손자 아그립바 2세 때에 끝났다(주후 64).

 

2. 주후 66년~70년 사이에 일어난 유대인의 반란은 예루살렘을 통제 불가능한 도시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로마의 티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장군 티투스(아홉 번째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이고 도시 전체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하지만 그는 제2 성전(聖殿)의 서쪽 벽(壁) 일부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로마의 위대함을 후세에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일곱 금등대(메노라)를 전리품으로 챙겨 로마로 가져갔다. 메노라를 옮겨가는 장면은 로마에 세워진 티투스의 개선문 안쪽에 조각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3.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성전산 서쪽 부분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위치한다. 이것은 당시 파괴되지 않고 남은 성전산의 서쪽 지지벽(옹벽)의 일부이다. 예루살렘이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병에 의해 무너지자 일부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열심당원들은 사해 서쪽에 위치한 천연 요새 마사다로 퇴각하여 최후까지 저항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주후 74년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대가로 전세계로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마태 27:25)

 

4. 예루살렘은 2천년 동안 20여 차례나 주인이 바뀌고, 10여 차례나 완전히 파괴되어버리 는 비운의 도시이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수난과 예루살렘의 비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이 벽 앞에서 통탄의 눈물을 흘렀다. 그 슬픈 역사는 2천 년 가까이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 됐다. 성전이 파괴된 날이 아브월(8월) 9일이며 주 후 135년에 유대인 2차 대 반란을 계기로 유대인들은 국외로 추방을 당하였으며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면 죽임당하는 법이 만들어 졌다. 비잔틴 시대(주후 324 -640)가 돼서야 유대인들이 성전 파괴일 하루만 통곡의 벽에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 해주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이날만큼은 통곡의 벽에 모여서 성전의 회복과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이날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통곡의 벽'이라는 용어는 유럽의 여행자들이 통곡의 벽 앞에서 밤을 새워 슬프게 우는 경건 한 유대인들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5. 이슬람교도들은 이 벽을 “서쪽의 벽” 혹은 부라크의 벽(Burzq wall)이라 부른다. 이곳은 그들에게도 성스러운 곳이다. 본래 헤롯시대의 서쪽 벽의 총 길이는 485m 정도이었으며 ‘통곡의 벽”은 보통 57m 정도 길이에 19m 정도의 높이가 되는 광장 앞의 노출된 부분만을 지칭한다. 기초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전체 높이는 약 32m지만 13m는 지하에 파묻혀 있다. 이 벽은 45단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28단은 지표 위에. 17단은 지하에 있다. 헤롯이 성전을 재건한 ‘제2성전 시대’ 에는 큼직큼직한 돌로 쌓았다. 즉 1단부터 7단까지는 제2성전 시대의 돌들이다. 그리고 그 위의 4단까지는 로마 시대에 쌓아올린 돌들이다(주후 7세기), 마지막의 작은 돌들은 오스만 터키시대에 쌓여진 것이라고 한다. 통곡의 벽은 히브리어로 ‘하코텔 하마아라비’라고 하며, 코텔은 ‘벽’이라는 뜻이고 하마아라비는 ‘서쪽'이라는 뜻이다.

 

6. 이곳은 유대인들의 종교의식과 국가의식, 그리고 성전 지성소의 서쪽 벽에 근접했다는 전통적 의미에서 가장 성스러운 지점이 되었다. 이곳은 한 면으로 성전의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애도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또 한 면 20세기에 들어서서는 국가적으로도 이스라엘의 과거 영광을 되새기고 그 회복을 소망하는 교감의 장소가 되었다. 민족 전통의 유산이 숨쉬는 통곡의 벽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통곡의 벽은 그들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1967년 6일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특공대원들이 통곡의 벽에 기대서서 기도하는 장면은 얼마나 그들이 이 통곡의 벽을 사모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국제법상으로는 여전히 수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7. 현대의 유대인들은 아브월 9일인 성전 파괴일 하루 전날 밤에 통곡의 벽에 모여서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며 하루를 금식기도하며 보낸다. 통곡의 벽에는 성전 파괴일과 초막절에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모인다. 현재의 통곡의 벽에서는 군인들의 선서식과 성인식 등의 행사가 열린다. 통곡의 벽은 중간이 벽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남자들이 기도하는 곳은 북쪽이며 여자들은 남쪽에서 기도한다. 남자들은 통곡의 벽에 기도하러 들어갈 때에 ‘키파’라고 하는 작은 모자를 쓰고 들어가야 한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으며 구약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8. 유대교에는 종파별로 머리에 쓰는 키파와 복장으로 분간할 수 있다. 일반 유대교인들은 평상복에 키파(머리에 쓰는 납작한 모자)만을 쓴다. 정통적인 유대인들은 긴 수염을 기르며 검은색 양복과 키파를 쓰고, 그 위에 검은 외투까지 입는다. 그들은 남자지만 여자처럼 옆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고, 상의로부터 실들이 엉덩이까지 내려온다.

 

9. 1929년에는 통곡의 벽을 두고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사건이 벌어졌다. 이 종교 분쟁은 1928년 9월 일부 유대교 신자들이 남자와 여자가 따로 모여 앉아 예배를 올려야 한다는 유대교식 집회를 위해 벽에 막과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성지라 여기는 곳에 일방적으로 공사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분노를 느꼈고 돌을 던지며 이를 제재하려고 했다. 당시의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종교적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에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년 6월의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후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유대인들은 1967년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할 때까지 19년간 이 곳에 접근할 수 없었다.

 

10. 통곡의 벽 앞의 대형 광장은 일만 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개방된 곳이다. 기도자들은 밤낮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특별한 행사(할례, 성인식. 새 토라 두루마리의 봉헌 등)가 이곳에서 수행된다. 이 광장은 1967년 6일 전쟁 직후 형성되었다. 당시 광장은 마그리비 또는 모로칸 구역이라 불리는 아랍인 거주지였다, 1967년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인들이 아랍인들을 철거하고 현재의 광장을 만들었다.

 

11. 주후. 132년 바르 코크바 반란의 실패 이후부터 이스라엘 본토에 남아있거나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모두 파괴된 성전을 향해 기도했다. 성전산의 모든 남은 구조물들과 성전 자체가 유대인들의 사모하는 바가 되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로. 유대인들의 신앙 중심은 통곡의 벽과 연관되었다. 1520년 스페인에서는 대규모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 영원한 표상이 되었다. 그때 이후로 모든 문서에서 통곡의 벽을 유대인들을 위한 기도의 장소로 언급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에 하나님께 보내는 쪽지를 써서 돌들 틈에 끼워 넣는다. 이중 많은 기도들은 개인적인 기원이지만 또 많은 기도들은 제 3 성전의 건축을 위한 기도이다.

 

12.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의 기도를 들으심에 관한 일곱 가지 조건 중 마지막 세 가지가 열왕기상 8장 48절에 강조되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룩한 땅과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과 셋째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전이다. 이 세 가지, 곧 거룩한 땅과 거룩한 성과 거룩한 성전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세 가지 핵심적인 항목들이다. 거룩한 땅, 거룩한 성, 그리고 거룩한 성전은 모두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좋은 땅이시며, 우리의 성이시며, 우리의 왕국이시며,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이시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는 거룩한 땅과 거룩한 성과 거룩한 성전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목표를 두어야 함을 가리킨다. (왕상 8:48 각주1)

 

13.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밖으로 추방 당했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에 대해서 괘씸죄를 적용하여 비잔틴 시대(주후324년-640)까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서야 일 년에 딱 한 번 성전파괴 기념일(아브월 9일) 때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각지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이 날 모여서 파괴된 성전을 두드리며 통곡하는 전통이 생겼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에는 유대교를 인정했던 관용 정책을 폐지하고 주피터 신전을 세웠다. 비잔틴 시대(주후 324-640)에는 기독교가 신전을 접수하여 관리했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636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언자 마호메트가 이곳에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황금사원을 지었다. 결국 통곡의 벽은 유대교의 성지인 동시에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었다.


14. 통곡의 벽은 헤롯왕이 남긴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통곡의 벽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늘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유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 중 하나가 "내가 이 성전을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왕상 8:57)"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은 무너졌으나, 그 성전을 지탱하던 통곡의 벽에 하나님의 임재가 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대 전승에 따르면 성전산은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된 곳이며 아담이 살았던 곳이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곳이다. 하란 땅으로 도망하던 야곱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게다가 솔로몬과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졌던 곳이다.

 

15.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곧 지구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므로 성전산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으며 심지어 항공기조차도 성전산 위로 비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성소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하여 들어갈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은 제 1의 성지이며 지성소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통곡의 벽은 365일 24시간 개방하며 누구든지 아무 때나 와서 볼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기도의 소원대로 1967년 6월에 예루살렘을 회복했으며 이때부터 자유롭게 통곡의 벽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후 135년 추방된 이래로 거의 1800년 만에 다시 통곡의 벽을 회복한 것이며, 주전 586년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이래로 약 2500년 만에 예루살렘에 관한 주권을 회복한 것이다.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든지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왕상8:38-39상)

 

   


 



                                       통곡의 벽 지하(헤롯의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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