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은 하나의 원칙일 뿐 아니라 생명이다. 문제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원칙으로만 알고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보지 못한 데 있다. 생각해 보라. 몸을 생명 없이 어떤 원칙으로만 삼을 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일이든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들과 협력하면서 마음속은 다르다면 그 협력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몸이 하나의 원칙만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몸이 생명인 것을 모르고 일종의 원칙으로만 삼고 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밖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룸을 받지 않은 채, 단지 형제들은 단독으로 행동하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것을 배워 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배워서 된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도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몸의 생명을 알 수 있는가? 기본적인 조건은 당신의 장막을 벧엘과 아이 사이에 두는 것이다. 서는 벧엘이고 동은 아이여야 한다. 그러므로 몸을 아는 것은 벧엘만이 아니라 아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는 원문에서 ‘무더기’라는 뜻이다. 벧엘은 집 곧 하나님의 집이고, ‘아이’는 무더기 곧 황폐의 무더기이다. 황폐의 무더기는 옛 창조를 가리킨다.
‘아이’가 대표하는 것은 바로 옛 창조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향하려면 반드시 황폐의 무더기와 등을 맞대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육체의 생명이 처리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동쪽이 아이일 때 당신의 서쪽이 벧엘일 수 있다. 만일 당신의 동쪽이 아이가 아니라면 당신의 서쪽은 벧엘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는 곳은, 육체의 생명과 천연적인 생명을 처리하는 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집이 무엇인지를 보기 원한다면 먼저 소극적인 면에서 황폐의 무더기를 거절해야 한다.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심판받아 마땅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 때, 당신은 비로소 자연히 다른 형제자매들과 합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섞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옛 창조의 생명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창조가 처리받을 때 우리는 자연히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살게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며 몸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옛 창조의 생명을 반드시 처리해야 하며 완전히 거절해야 한다. 이 무더기는 황폐의 무더기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집이 아니다. 옛 창조가 심판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옛 창조는 여전히 그의 자랑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여전히 좋다고 느낀다. 설령 그가 매일 입으로 자신은 약하고 부패했다고 말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 그는 심판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 그는 타락한 것을 타락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그는 다른 사람과 합하지 못하는 곳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때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 쓸데없는 사람이고,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임을 보도록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질 때,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살게 된다. 육체가 처리되지 않고 몸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원칙이 아니라 더욱 하나의 생명임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제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