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가나안 땅(3)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
2013-06-06 , 조회 (109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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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을 떠나 벧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 가서, 서쪽으로는 벧엘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서도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2:8)

And he proceeded from there 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pitched his tent, with Bethel on the west and Ai on the east;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upon the name of Jehovah.(Gen. 12:8)

B. 벧엘(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몸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 12: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겜으로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벧엘로 인도하셨다. 벧엘’은 원문에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삼손같이 능력이 있으나 분산된 사람 수백 명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또한 그분의 산 돌들을 질서 없는 무더기로 쌓아 두기를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집인 하나의 전을 건축하고자 하신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전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집은 모세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다스린다.

이것은 히브리서 3장 6절에서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분이 일으킨 그릇은 반드시 그분의 집이어야 한다. 복음을 잘 전하는 몇몇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분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혹은 부흥회를 이끌 줄 아는 몇몇 사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겜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또한 벧엘이 있어야 한다. 모든 능력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집과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개인주의에서 구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단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인 ‘자유’를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자유’를 좋아하고, 또한 그들 개인의 자유를 보전하는 데 능하다. ‘자유!’ 형제자매여,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집의 간증을 알고, 하나님의 그릇이 흩어진 조각난 돌들이 아니라 하나의 집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서로 순종하기를 배우고 개인적인 행동을 제하며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앞에 있는 길을 가도록 배울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의 원칙일 뿐 아니라 생명이다. 문제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원칙으로만 알고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보지 못한 데 있다. 생각해 보라. 몸을 생명 없이 어떤 원칙으로만 삼을 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일이든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들과 협력하면서 마음속은 다르다면 그 협력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몸이 하나의 원칙만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몸이 생명인 것을 모르고 일종의 원칙으로만 삼고 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밖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룸을 받지 않은 채, 단지 형제들은 단독으로 행동하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것을 배워 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배워서 된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도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몸의 생명을 알 수 있는가? 기본적인 조건은 당신의 장막을 벧엘과 아이 사이에 두는 것이다. 서는 벧엘이고 동은 아이여야 한다. 그러므로 몸을 아는 것은 벧엘만이 아니라 아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는 원문에서 ‘무더기’라는 뜻이다. 벧엘은 집 곧 하나님의 집이고, ‘아이’는 무더기 곧 황폐의 무더기이다. 황폐의 무더기는 옛 창조를 가리킨다.

‘아이’가 대표하는 것은 바로 옛 창조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향하려면 반드시 황폐의 무더기와 등을 맞대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육체의 생명이 처리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동쪽이 아이일 때 당신의 서쪽이 벧엘일 수 있다. 만일 당신의 동쪽이 아이가 아니라면 당신의 서쪽은 벧엘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는 곳은, 육체의 생명과 천연적인 생명을 처리하는 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집이 무엇인지를 보기 원한다면 먼저 소극적인 면에서 황폐의 무더기를 거절해야 한다.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심판받아 마땅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 때, 당신은 비로소 자연히 다른 형제자매들과 합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섞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옛 창조의 생명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창조가 처리받을 때 우리는 자연히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살게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며 몸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옛 창조의 생명을 반드시 처리해야 하며 완전히 거절해야 한다. 이 무더기는 황폐의 무더기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집이 아니다. 옛 창조가 심판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옛 창조는 여전히 그의 자랑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여전히 좋다고 느낀다. 설령 그가 매일 입으로 자신은 약하고 부패했다고 말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 그는 심판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 그는 타락한 것을 타락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그는 다른 사람과 합하지 못하는 곳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때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 쓸데없는 사람이고,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임을 보도록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질 때,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살게 된다. 육체가 처리되지 않고 몸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원칙이 아니라 더욱 하나의 생명임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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