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시험받음- ㅡ아비멜렉 집을 위해 기도함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
2013-07-12 , 조회 (106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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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사람은 신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네가 살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창 20:7)
Now therefore return the man's wife, for he is a prophet, and he will pray for you, and you will live. But if you do not return her, know that you shall surely die, you and all who are yours.(Gen.20: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들을 고쳐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창 20:17)
And Abraham prayed to God; and God healed Abimelech and his wife and his female servants, so that they bore children.(Gen. 20:17)

이 일 후에 아브라함의 첫 번째 시험인 육체의 손으로 이스마엘을 낳는 일은 지나갔다. 사람의 면으로 볼 때 그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이삭을 낳아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아들의 문제로 두 번째 시험을 받게 될 줄이야 누가 생각했겠는가?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20:1). 아브라함은 거기서 또 한 번 애굽에서 사라를 자기 동생으로 칭했던 것과 동일한 죄를 범했다. 그때 애굽에서 바로의 책망을 들을 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이번에 그랄의 아비멜렉에게 왔을 때 또다시 동일한 죄를 범했다. 아!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는 이미 18장에서 말한 그러한 교통의 고봉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이런 단계로 하락될 수 있단 말인가?

20장에서 우리는 12장에서 알려 주지 않은 한 가지 일을 볼 수 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책망하면서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9-10절)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가 그렇게 행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11-13절).

그러므로 이 문제의 뿌리는 애굽에 있을 때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이다. 애굽에서의 실패는 뿌리의 노출에 지나지 않고 실패의 뿌리는 메소포타미아 때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그랄에 이르렀을 때 그 뿌리가 다시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대하신 것은 그와 사라가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그와 사라가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닥칠 때 그들의 부부 관계가 오라비와 누이의 관계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선 위치는 믿음이고, 사라가 선 위치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믿음이고, 하나님 측면에서 말한다면 은혜이다.

믿음과 은혜는 나눌 수 없고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은혜를 제한다면 믿음이 없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없게 되며, 그리스도를 이끌어 오지 못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와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뿌리는 메소포타미아 때부터 심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드러나고 이제 또다시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 때부터 있었던 그 뿌리를 뽑아 버리고자 하신다. 만일 이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이삭이 나오지 못한다. 하나님은 믿음과 은혜로써만 하나님의 간증을 지킬 백성을 얻으실 수 있다. 믿음만으로나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이끌어 사라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사라와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한 가지 기묘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다”(18절)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준 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17절). 이 일 후 21장에 가서 우리는 사라가 이삭을 낳는 것을 본다. 이것은 매우 기묘한 일이다. 아비멜렉 집의 여자들이 다 생산치 못하는데 어찌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그녀들을 치료하사 생산케 되었는가? 다른 사람이 이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아내가 생산해 본 적이 없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일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심은 과오의 뿌리를 뽑아 버리셨다. 이제 그는 자기 아내가 생산할 수 있는가는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았다. 아비멜렉 집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는 조금도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정도로 구원되었다. 자기에게 아들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의 생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그의 육체가 확실하게 처리되었다. 이것이 아들 문제로 아브라함이 받은 두 번째 시험이다. 이번의 시험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시라는 공과를 배웠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처럼 생산하지 못했는데도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알았고, 능력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신다. 그분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는 정말 대가를 지불하였는데 그 대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가 중보 기도 해 주는 그 일은 바로 그가 추구하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중보기도 하게 하신 이 일은 일생토록 그가 소유하지 못한 그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이 점을 만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멈추도록 하였다.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보지 않은 사람만이 그날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자. 그분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보지 않을 정도로 인도하셨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신을 보지 않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친’이라 할 때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의 ‘아버지’는 의미가 다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고, 하나님과 믿는 이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이며 아주 친밀한 관계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날 때 이미 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공과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아버지 곧 삼일 하나님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분이 모든 것의 아버지요, 만유의 아버지이시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한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미 이 공과를 배웠다. 아브라함은 그의 집에 자녀가 줄지어 있기 때문에 아비멜렉 집의 여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는 일로 공과를 배워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알았다. 이제 아비멜렉의 일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공과를 배워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일 후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낳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제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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