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24>-(143) 인생은 항상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며,우리의 환경도 항상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으로 얻은 후에만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만족스러울 수 있다
이사야서
2013-08-12 , 조회 (29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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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11-13 내가 궁핍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희년’은 걱정과 근심이 없고, 염려와 걸림돌이 없으며, 아무런 부족함이 없고, 아무런 질병과 재난이 없고, 어떠한 어려움도 없으며, 유익한 모든 것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오늘날 어떻게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매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 마음의 원함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오늘은 어떤 일이 만족스러울지 모르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항상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환경도 항상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으로 얻은 후에만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만족스러울 수 있다.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은 모든 것에서 만족할 수 있는 정도까지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했다고 말했다(빌 4:11하-13). … 우리가 온갖 종류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를 평온하게 하고 모든 염려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밖에 있는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희년, 22-23쪽)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생계를 위하여 직장에서 일하는 것을 제외하고 세 종류의 수고가 있음을 볼 것이다. 첫째 종류의 수고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행동을 하고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는 수고이다. 이런 수고 안에서 사람들은 겸손해지고 인내심을 갖고 사랑을 품으려고 분투한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행위는 그러한 것들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도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없다(엡 2:8-9). 이것은 누구도 자신의 행동과 성격을 개선하고, 율법을 지키고, 착하고 인내심을 갖고, 친절하고 정직해지려고 노력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참으로 수고이다. 신약에서는 이것을 행위라 부른다.

 

성경에 의하면, 둘째 종류의 수고는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염려하면서 수고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가 매일매일 아무런 염려 없이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일하는 데 보내는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근심하는 데 보낼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날까지 아무런 염려나 근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매일매일 모든 사람이 염려한다. 여러분은 건강이나 직장이나 기타 많은 일들로 염려할 것이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체험으로부터 나는 염려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주님을 누리는 것임을 배웠다. 주님을 누리고 있지 않을 때면 언제나 나 또한 염려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염려의 반대이시다.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셋째 종류의 수고는 고난이다. 고난은 매우 힘든 수고이다. 우리가 희년 안에서 하나님을 누릴 때 마땅히 아무런 고난이 없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육체에 … 가시’로 인해 고난 받았다(고후 12:7). 이 가시에 관하여 바울은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기를 세 번 주님께 간구하였다(고후 12:8). 그러나 가시를 없애는 대신 주님은 그에게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바울에게 “아니다. 나의 은혜가 충분하므로 나는 그 가시를 없애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누린다면 너는 어떤 고난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 같다. (누가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9, 577-578쪽)

 

결론적으로, 희년은 우리가 우리의 소유와 누림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서,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께 돌아갔고, 죄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이 때문에 발버둥치고 노력하는 것은 소용없다.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길이다. 혹 어떤 사람은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고 성질도 내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선을 행할 능력은 없다. 결심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참되고 살아 계신 주님을 접촉하고 누리기를 배워야 한다. 이럴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해방과 우리의 자유가 되신다. 그 결과 우리는 더 많은 소유뿐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갖게 된다. (희년, 64-65쪽)

추가로 읽을 말씀: 누가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8

누가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9

 

출처: 한국복음서원<아침부흥 거룩한 말씀>

http://www.kgbr.co.kr/mediazone_mann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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