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동기 ―하나님의 사랑
생명의 체험
2013-11-13 , 조회 (132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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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형제님들, 내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권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거룩하고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합리적인 봉사입니다.(롬 12:1) 
I Exhort you therefore, brothers,through the compassion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sacrifice, holy, well pleasing to God,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Rom 12: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우리가 단정하는 것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향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5:14-15) 
 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s us because we have judged this, that One died for all, therefore all died; And He died for all that those who live may no longer live to themselves but to Him who died for them and has been raised.(2 Cor. 5:14-15)  

헌신의 동기는 헌신하는 사람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헌신을 잘 하려면 헌신의 근거를 깨달을 뿐 아니라 헌신의 동기를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께 팔려 구속함을 받았다는 헌신의 근거를 알더라도 이러한 깨달음만으로는 그의 느낌을 불러일으키거나 그의 마음을 움직여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못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신 것이 의자나 의복 같은 무생물이었다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러한 것들을 직접 처리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구속하신 것은, 각자 생각과 애정이 있고, 뜻(의지)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얻기 원하시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실 합법적인 권리와 근거를 가지고 계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할 마음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헌신하기를 바라신다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야 한다. 우리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사랑의 동기를 주셔야 한다. 헌신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두루 뿌리실 때마다 우리는 자연히 사랑의 노예가 되어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이러한 헌신은 성경의 두 군데, 고린도후서 5장 14절, l5절과 로마서 12장 1절에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부터 15절까지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강권한다’는 말의 원어는 홍수가 밀어닥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사랑하심은 우리에게 홍수가 밀려옴 같아서,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며 그분을 위하여 살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여기에 언급된 자비하심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한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의 동기를 갖게 하여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헌신하게 한다. 이 두 구절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헌신의 동기이다. 정상적인 헌신에 있어서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아주 필요하다. 만일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권리를 갖고 계신다는 헌신의 근거를 아는 데에만 있다면

이러한 헌신은 이유에만 근거를 두고 있을 뿐 달콤함과 강렬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할 때 동기가 되는 사랑이 있고 우리의 느낌이 하나님의 사랑을 접촉하게 된다면, 이러한 사랑의 강권함으로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헌신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에는 헌신이 달콤하고 강렬할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 관계가 적절한 사례이다. 만일 결혼 관계가 단지 권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들의 삶이 달콤하거나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참된 결혼 관계는 권리에 근거를 둘 뿐 아니라 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므로 남편과 하나 되어 함께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참된 헌신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접촉하고 그분이 진정 사랑스러움을 보게 될 때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헌신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에 기초를 둔 헌신이 비록 마음가짐에 따라 변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렬한 헌신은 강권하는 사랑의 결과이다. 주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은 체험이 없는 자들은 위대하고 강렬한 헌신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다. 찬송가 85장(모든 사람 대신 죽은 십자가의 주 생각할 때)을 보면 주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헌신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찬송에서는, 나를 구원한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이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자신 위해 살던 생활을 버린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 이마와 손과 발이 슬픔과 사랑과 피로 적셔져 있는 그분을 본다. 이 모든 것은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을 볼 때, 온 우주를 그분께 드린다 해도 여전히 부끄럽게 여겨지리라. 이는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고귀하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에 보답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 사랑을 더럽히는 셈이 된다. 그분의 사랑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주와 같은 데 비해서 나의 헌신은 더러운 넝마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께 전혀 값어치가 없다. 어느 날 그 영이 이 사랑을 우리 마음 전체에 부으실 때, 우리 또한 이와 같이 강렬한 헌신을 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자신을 헌신하고 헌신의 길에서 주님을 따른 후에도 주님의 달콤한 사랑을 맛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사랑의 강권함을 필요로 한다. 헌신하는 길에서 어떤 사람은 자주 고통과 손실을 당한다. 주님의 사랑을 자주 맛보는 자들만이 고통받는 중에서도 달콤함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사도들은 멸시와 감금당함을 많이 겪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영광스럽고 즐거운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겼기 때문이다(행 5:40-41). 역대의 순교자들이 죽음의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주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것도 그들이 주님의 달콤함을 맛보고 그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주님 사이의 사랑은 언제나 새로워야 한다. 사랑의 동기가 우리 안에 유지되어야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언제나 새롭고 달콤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안정되고 강한 헌신을 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방면이 요구된다. 한 방면은 근거를 갖는 것, 즉 나 자신이 하나님께 팔려 하나님께 속하였으므로 나 자신을 그분께 헌신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다른 한 방면은 동기를 갖는 것, 즉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며 이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나 자신을 기꺼이 그분께 헌신하게 함을 깨닫는 것이다. (생명의 체험, 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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