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안에서의 야곱의 성숙
창세기
2013-11-27 , 조회 (79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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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파라오 앞에 서게 하자, 야곱이 파라오를 축복하였다.(창 47:7)
And Joseph brought in Jacob his father and set him before Pharaoh, and Jacob blessed Pharaoh.(Gen. 47:7)

아브라함에게는 또한 생명 안에서의 성숙한 야곱이 필요했다. 창세기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축복한 첫 번째 사람은 멜기세덱이었다(14:18-19). 히브리서에서 계시한 바와 같이,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야곱이 살았던 것보다 더 많이 나이들었을 때조차도 어느 누구도 축복하지 않았다. 그는 축복을 받았지만, 결코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돌리지 않았다. 멜기세덱 후에 다른 사람을 축복한 사람은 이삭이었다. 그러나 이삭은 소경이 되어 축복했다. 그는 속았고, 분명하게 축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축복했다. 그는 에서 대신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었다(27장). 그러나 창세기 끝의 기록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야곱은 잘 볼 수 없었지만 매우 분명하게 축복했다.

성숙한 후, 야곱은 그가 만난 사람들 모두에게 축복했다. 가는 곳마다 그는 축복밖에 하지 않았다. 야곱이 바로 앞에 갔을 때, 그가 첫 번째로 한 것은 그를 축복한 것이었다(47:7). 잠시 바로와 이야기한 후, 야곱은 그를 다시 축복했다(47:7). 야곱은 축복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축복하는 사람이었다. 축복받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는 쉽지 않다. 손자는 자기 할아버지를 축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손자는 생명 안에서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곱은 성숙했기 때문에, 그가 만난 모든 사람, 이방의 왕이자 불신자인 바로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축복했다. 야곱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의 부담은 다만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야곱의 상황을 살펴보라(48:8-20). 야곱이 장자인 므낫세 대신 에브라임 위에 그의 오른손을 얹었을 때, 요셉은 기뻐하지 않았고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48:18)라고 말하면서 므낫세의 머리 위로 아버지의 오른손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야곱은 거절하면서,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48:19)라고 말했다. 야곱은, 『나는 육체적으로 눈멀었으나 영적으로는 매우 밝다. 내가 하는 것을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분명하고 충만하고 풍성한 축복을 했음을 본다. 또한 야곱은 매우 분명하게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다. 이 축복들은 성경에서 기본적인 예언들의 기초가 된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있는 예언들을 알고자 한다면,

야곱에 의해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봄으로써 그 기초, 그 기본적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야곱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온전히 성숙했기 때문에 신성한 계시의 온전함을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할 수 있었다. 그는 야곱으로 태어났으나 이스라엘로 변화되었다. 그는 빼앗는 자, 뒤꿈치를 잡는 자로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왕자(a prince of God)로 변화되었다. 그의 생명은 매우 투명하고 충만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명이 투명하고 충만하게 된다면, 우리는 축복밖에 할 수 없다. 이것이 성숙의 표시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은 생명의 체험 안에서 한 온전한 사람을 형성한다. 아브라함은 축복하지 않았으므로 생명 안에서 성숙하지 않았다. 이삭은 어느 정도 성숙했으나 생명의 성숙함의 풍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분별없이 축복했다. 생명 안에서 성숙한 야곱은 온전하고 투명하게 축복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 신성한 말이었고 그가 축복하는 것은 다 그분의 모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경륜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의 표현인 이스라엘이 되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전체적인 빛을 가진다면, 창세기가 성경 전체의 온전한 계시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창세기의 끝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사람, 생명 안에서 투명하고 충만하고 분명하고 변화된 사람을 본다. 변화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한 씨요 축소판이다. 창세기의 시작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있다. 창세기의 끝에는 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그 안으로 역사해 넣으시어 그분의 표현이 되게 한 사람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을 귀히 여기지만, 그의 생명은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생명이 훨씬 더 높았다.(창 LS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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