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물려받음
창세기
2013-12-08 , 조회 (99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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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지만, 은혜와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기 때문이다.(요 1:17절)
For the law sas given through Moses; grace and reality came through Jesus Christ.(John. 1:17)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이삭의 체험(21:1-28:9, 35:28-29)이라고 불리우는, 체험의 둘째 방면에 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삭의 체험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체험의 세 방면-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것,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생활한 것, 하나님과 함께 교통 안에서 생활한 것-을 이해하기는 아주 쉽다. 그러나 이삭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하겠는가? 21장부터 28장까지의 그의 삶의 기록을 읽을 때, 생명의 체험에 대한 어떤 것을 보는가? 우리는 그가 부르심받았거나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생활했거나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이삭이 태어나 결혼했고 그 아들을 낳은 것을 본다. 그러나 이삭의 기록에서 생명의 체험을 찾기는 어렵다. 이삭의 삶의 기록 안에는 은혜의 체험이 내포되어 있다. 이삭이 체험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물려받은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신약에서 계시한 것과 같이 온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은혜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이다(요 1:17).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은혜에 대한 온전하고 완벽한 계시가 있으며, 신약에서 은혜라는 용어가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심지어 신약은 은혜를 언급함으로써 끝난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성경은 구약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신약에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말씀으로 끝맺는다. 이삭에 관한 창세기의 기록에 은혜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이 그 기록에 함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성경에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을 기술하는 용어는 성경에 없다.
 
이삭의 체험은 창세기 안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가졌던 체험을 은혜의 체험으로 나타내기는 어렵다. 신약의 계시에 의하면, 생명의 체험에 관한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리된 세 개체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한 사람의 생명의 체험의 방면들로 간주된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생활하고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생활하는 방면을 나타낸다. 이삭은 은혜를 물려받고 은혜의 기업을 누리는 방면을 나타낸다. 야곱은 선택되어 주님에게 다루심받고 하나님의 왕자(a prince of God)로 변형되는 방면을 나타낸다. 생명의 체험 안에는 은혜를 누리는 누림의 방면이 있다. 우리 중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고통받는 생활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기도로 울부짖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어왔다.

오늘은 누림의 때가 아니라 고통의 때이고 십자가를 지는 때이며 우리의 누림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 메시지를 들어본적이 있는가? 나는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한 방면이라고 말하겠다. 다른 방면, 즉 누림의 방면이 있다. 성경적이고 체험적인 면에서 볼 때, 은혜는 누림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은혜는 누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아브라함의 방면과 이삭의 방면과 야곱의 방면의 세 방면이 있다. 아브라함의 방면에서 우리는 많은 누림을 볼 수 없다. 아브라함은 축복받았고 확장되었지만 많은 누림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잃었고 롯은 그를 슬프게 했다. 그가 믿었던 엘리에셀은 거절당했고 그 자신의 노력으로 그의 후처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쫓겨났다. 이삭이 태어난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요구하셨다.

이삭이 돌아온 뒤 너무나 빨리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우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상실의 방면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매우 고통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오직 손실의 생활일 것이다. 손실은 다만 그리스도인 생활의 한 방면일 뿐이다. 로마서 5장 2절은, 『우리가 서 있는 손실 안으로 들어감을 얻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손실 안에 두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의도는 우리를 은혜 안으로, 누림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누림 안으로 이끄시려 한다. 그러나 이 은혜의 한 장애물이 있으니 그것은 자아이다. 우리 자신들이 장애물이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은혜가 그분과 함께 왔고,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로 이끌려 왔지만, 이 은혜의 가장 큰 장애물인 당신과 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의 체험을 가지기 전에 생명의 체험의 첫째 방면을 나타내는 아브라함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풍성함의 충만한 누림을 가지려면 우리가 다루어지고 할례받고 잘라져야 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았다면, 이삭은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할례 후에 왔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받은 후에, 하나님은 이삭이 태어날 것을 그에게 말씀하셨다(17:19). 결국 21장에서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은 하나님의 방문과 함께 왔다. 그는 하나님의 방문에 의해서 태어났다. 하나님의 방문은 이삭의 출생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사라를 방문하셨고 그 방문은 이삭의 출생이 되었다. 이것이 은혜이다. (창 LS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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