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물려받음 (3)
창세기
2013-12-08 , 조회 (87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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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지금의 내가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고전 15:10)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unto me did not turn out to be in vain, but, on the contrary, I labored more abundantly than all of them, 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which is with me.(1 Cor. 15:10)

만일 우리가 이삭 없이 아브라함만 가졌다면, 아브라함의 기록을 보고 매우 실망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고통받는 손실뿐이라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체험을 볼 때 우리는, 『나는 왜 아브라함이 그렇게 많은 손실의 고통을 겪었는지를 이제 이해한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극적인 체험들은 이삭의 적극적인 누림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것들을 얻었다. 그는 축복받았고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24:36, 25:5). 아브라함은 이삭이 얻도록 고통받았다. 아브라함이 고통받을수록 이삭은 더 얻는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쌍한 아브라함, 당신은 다만 고통받는 사람이다. 당신의 고통으로 얻은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삭을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일 뿐 아니라 또한 이삭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형제여, 당신은 항상 고통받는 불쌍한 아브라함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내가 또한 이삭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까?』라고 응수할 것이다. 나는 얻기 위해 손실을 겪어왔다. 나는 아브라함으로서 잃고, 이삭으로서 얻는다. 나는 다만 아브라함만이 아니다. 나의 이름은 아브라함-이삭이다. 손실의 방면에서 나는 아브라함이고, 얻는 방면에서 나는 이삭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 둘 다이다. 아브라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받았고 아브라함 안에서 믿음으로 생활하기를 배워왔고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살기를 배워왔다. 동시에 이삭으로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체험에서부터 얻었던 모든 것을 누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어느 쪽의 체험을 더 귀히 여기는가?

아브라함의 체험인가, 아니면 이삭의 체험인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체험 없이 이삭의 체험을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이삭의 체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다루셨던 것처럼 우리를 다루시고 계신다. 은혜에 관한 문제는 여러 해 동안 감추어져 왔고 숨겨져 왔고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어떤 것이며,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위해 일을 하고 살고 역사하기 위해서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매우 깊다. 바울은,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나는 좋은 차, 좋은 직업, 좋은 아내를 하나님의 은혜로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는 것이나 가지는 것이나 일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존재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은혜가 그의 존재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15장 10절과 함께 둔다면, 은혜가 오직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의 바깥에 있거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위격(a divine Person)이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성분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계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한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 바깥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는 바로 우리가 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살고 일하고 일들을 행하기 위해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선한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하려고 노력하고 우리 스스로 다른이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는 것을 성공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거절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니다. 아브라함아,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것이 네 안으로 역사해 들어가서 너로부터 역사해 나오기를 원한다. 너는 나의 방문 없이 이스마엘을 낳았다. 나는 하늘에 있었고 너는 땅에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는 나와 상관 없고 나의 방문과 상관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그를 인정하지 않겠다. 어느 날 나는 사라를 방문할 것이고 나의 방문은 이삭을 태어나게 할 것이다. 나는 오직 그만을 인정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다른이들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방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고, 심지어 우리를 위해 다른이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오직 이런 사랑만을 인정하실 것이다. 당신의 사랑은 이스마엘이다. 하나님의 방문에 의한 사랑이 이삭이다. 당신이 겸손하든 교만하든, 성격이 비뚤든 정직하든,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방문에서 나오지 않고 당신에게서 나온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은혜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우리 모두는 말해야 한다. 『오 주님, 나는 당신의 방문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만일 당신이 나를 방문하지 않은 채 나를 통해서 어떤 것을 행하시거나 나에게서 무엇이 나오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도 않고 겸손하거나 교만하지도 않겠습니다. 나는 내가 비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당신의 방문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하나님의 방문이 실지적인 은혜이다.

내가 내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문으로 다른이들을 사랑하고 겸손할 때, 그것이 은혜의 누림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목적은 단체적 표현을 갖기 위해 그분 자신을 단체의 사람 안으로 역사해 넣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신성한 계시의 근본 개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으로 들어가려는 목적으로 그를 부르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천연적 자아가 하나님의 목적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심지어 우리의 생활이 되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은 이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우리를 잘라야 하고 우리를 다루셔야 한다.(창 LS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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