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존재
영에 속한 사람
2013-12-16 , 조회 (73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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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육체 안에서 행하지만, 육체를 따라 싸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고후 10:3)
For though we walk in flesh, we do not war according to flesh; (2 Cor.10:3)

우리는 비록 육체를 죽음에 넘길 수 있고 육체로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6장 6절의 ‘멸하다’의 원문)있지만 육체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이 죄의 본성의 존재가 소멸되었고 육체가 우리 안에서 뿌리 뽑혔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큰 과실이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거듭난 생명은 육체를 고칠 수 없고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힘도 육체를 무(無)로 만들 수 없으며, 우리 영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또한, 육체를 좇아 행하지 않도록 사람을 강요하지 않는다. 육체이든, 사람들이 말하는 ‘육에 속한 성품’이든, 이것들은 항상 믿는 이들 안에 거한다. 믿는 이가 육체가 일하는 조건을 제공해 줄 때 육체는 즉시 활동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몸과 육체가 얼마나 긴밀한 연합을 가졌는지를 보았다.

그러므로 이 몸을 벗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육체를 벗을 수 없고, 육체의 모양이 어떠하든 더 이상 육체의 활동이 없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출생으로 인해 아담으로부터 얻은 부패한 몸이 변화되기 전에, 우리가 우리 속에서 육체를 뿌리 뽑아버리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을 받지 않았다(롬 8:23).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우리 몸은 구속을 받는다(고전 15:22-23, 42-44, 51-56, 살전 4:14-18, 빌 3:20-21).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 안에 남아 있는 한, 결코 몸 안에 있는 육체의 행위를 깨어서 방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이 최고에 이르러야만 바울의 행함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우리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고후 10:3)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육체 안에서 행했다’.

그러나 육체와 육체의 성품이 형편없이 부패했기 때문에 그는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았다’. 비록 그가 육체 가운데서 행하나 ‘육체를 따라 행하지는 않았다’(롬 8:4). 믿는 이가 육신을 벗지 않은 한, 결코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질적인 것을 따라 말하면 그는 육체 안에 살고 있지만(갈 2:20), 정신적인 면에서 그는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았다’. 만일 바울에게 싸우기 위한 육체가 있다면―단지 그는 사용하지 않았을 뿐임―누구에게 ‘육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십자가와 성령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을 때 믿는 이는 그들에게 더 이상 육체가 없고 완전히 거룩하다고 생각하여, 깨어 있지 않게 되고 외식과 게으름에 떨어진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거듭나고 거룩하게 된 부모로부터 태어난 자녀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거듭날 필요가 있는 육체에 속한 존재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거룩하게 된 믿는 이가 낳은 자녀는 거듭날 필요가 없고 육체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주 예수님은,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요 3:6)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누가 육체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그를 낳은 자도 육체임을 증명해 준다! 이는 오직 육체만이 육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육체에 속한다는 것은 부모가 아직 육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도들이 타락한 성품을 그들의 자녀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이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듭날 때 얻은 신성을 자녀들에게 전해 줄 수 없는데, 이것은 신성이 그들의 것이 아니고 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의 자녀에게 죄의 성품이 있는 이유는 죄의 성품이 그들에게 유전되었기 때문이다. 이 명확한 사실은 성도 안에 있는 죄의 성품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로 보건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위치로 회복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몸만 하더라도 몸이 아직 구속되지 않은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롬 8:23). 새로운 피조물일지라도 여전히 죄의 성품이 있고 여전히 육체가 있는 사람이다. 때때로 그의 느낌과 욕망이 그리 온전치 않고 아담이 죄가 없었을 때보다 더욱 비천할 때가 많다. 사람의 육체가 사람 속에서 뿌리 뽑아지지 않는 한, 사람이 온전한 느낌과 욕망과 사랑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에게 육체가 있기 때문에 범죄치 않을 가능성이 있는 위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믿는 이가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체에게 지위를 내어 준다면 육체는 다시 권세를 부리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멸시치 말아야 한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범죄치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나고 하나님으로 충만된 사람은 죄를 범하는 성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나무가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나무에게 가라앉는 성향이 없다는 뜻일 뿐 나무가 절대로 가라앉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다 보면 나무도 가라앉게 된다. 어린아이가 손으로 그 나무를 물 속에 가라앉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의 본질은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범죄할 성향이 없을 정도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이것은 우리가 범죄할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구원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믿는 이들이 아직도 죄에 대한 성향으로 충만하다면 이것은 그가 여전히 육에 속한 자요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주 예수님은 우리로 죄의 성향을 갖지 않게 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이는 세상의 침투나 사탄의 시험이 우리로 범죄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는 이는 마땅히 한 방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의 영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있으며, 예수의 죽으심이 그의 몸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에게 거룩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는 여전히 죄의 육체를 가지고 있고 육체의 존재와 육체의 더러움을 인식할 수 있다. 그가 거룩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이유는 그에게 육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지체의 행실을 죽이고 육체의 활동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믿는 이도 죄의 성품을 자기 자녀에게 전해 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얻은 것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천연적인 그 완전함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또한 육체의 존재가 믿는 이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에 속한 사람 2부, 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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