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육체의 시험을 받지 않는 단계에 이른 믿는 이는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예리한 시야를 갖고 깨어 있으며, 기도하고 때로 금식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믿는 이가 하나님의 목적과 자신의 소망을 낮추는 것은 합당치 않다. 믿는 이에게 범죄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절대로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의 육체를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성령도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며 주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실재화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육체의 다스림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육체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로 항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경계하기 위한 부르심이다. 십자가는 이미 육체를 온전히 못 박았고 이제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십자가가 이룬 것을 체험하게 된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하나님에게 이러한 은혜와 구원이 있을진대 만일 우리가 여전히 육신을 좇아 산다면 그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구원이 있으므로 우리는 전과 같이 빚진 자처럼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또 육체를 따라 산다면,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성숙한 많은 성도들 중에는 장기간 온전히 승리한 사람이 있다. 육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효력은 그에게 영(zero)이다. 이는 믿는 이들이 성령에 의해 주님의 죽음으로 육체의 생명과 성품과 육체의 모든 활동을 죽임으로써, 육체가 존재하나 없는 것 같은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죽이는 일이 이렇게 깊고 참되며 믿는 이들이 충성스럽게 항구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비록 육체가 존재할지라도 반항하는 힘이 조금도 없게 되어, 다시 믿는 이들을 격동시키기 어렵게 된 듯하다. 이렇게 육체를 온전히 이기는 것은 모든 믿는 이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이제 한 가지 경고를 주겠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구원이 완전하기 때문에 이 구원을 버리는 자는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두 개의 ‘만약’에 있다. 하나님 편에서 그분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다. 이제 우리는 사람 편에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대응하는가를 보면 된다. 비록 여러분이 거듭났지만 ‘만약 육체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영에 속한 삶을 잃어 버리게 되기 때문에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도 죽어야 하는데,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육체의 활동을 죽이는 이것이야말로 참된 죽음이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지 당신은 죽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죽음을 원하는가? 육체가 살면 성령은 (실지의 상황에서) 살 수 없다.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삶을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안배하신 것은 당신의 육체의 모든 능력과 활동을 십자가의 능력 밑에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우리는 생명을 적게 말하고 그 대신 먼저 죽음을 말해야 한다. 이는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원하는가? 당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신의 생명 안에 적용되기를 원하는가? 만일 원한다면 당신은 성령에 의해 몸의 모든 행실을 죽여야 한다. (영에 속한 사람 2부, 제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