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엘 라해로이에서 생활함
창세기
2013-12-28 , 조회 (121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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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그곳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여호와께서 그날 밤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씨가 번성하게 하겠다."(창 26:23-24)

And he went up from there to Beer­-sheba. And Jehovah appeared to him the same night and said, I am the God of Abraham your father. Do no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and I will bless you and multiply your seed for My servant Abraham's sake.(Gen. 26:23-24)

누림이 우리의 운명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누림을 가지는 곳을 돌보아야 한다. 이삭이 누림을 가졌던 곳의 이름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브엘 라해로이라는 곳이다. 이것은 「나를 지키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 혹은 「그분 자신을 나타내는 분의 우물」이라는 뜻이다(24:62, 25:11). 브엘 라해로이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나타내신다. 두 번째 장소에서 이삭은 다툼이라는 의미인 에섹(Esek)이라고 명명된 우물에서 누림을 가졌다. 에섹은 다투고 싸우고 논쟁하던 곳이었다. 세 번째 장소는 싯나(Sitnah)였다(26:21). 싯나는 적, 증오, 대적을 뜻한다. 네 번째 장소는 르호봇(Rehoboth)이라 불리워졌다. 르호봇은 「넓은 장소」, 혹은 「넓은 길」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이다. 마지막 장소는 맹세라는 뜻인 세바(Sheba)라고 불리워졌다(26:22-23). 그러므로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을 뜻한다. 이삭은 이 각각의 다섯 장소에서 은혜를 누렸다. 이 장소들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이삭이 자랐던 곳을 알아야 한다. 그는 브엘세바의 우물과 에셀나무 옆에서 자랐다. 결혼하기 전에 그는 브엘세바를 떠나서 남방으로 갔다(24:62).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 남쪽으로 간다는 것은 아래쪽으로 가는 것을 뜻한다. 나는 이삭이 갈 때,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나 헤브론을 떠났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나 헤브론에 남아 있었다. 이삭은 그의 어머니가 죽고 그의 종이 떠난 후에 남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돌아왔다. 흠정역에서는 그가 「라해로이의 길에서 왔다」라고 말한다. 히브리 원본은 그가 「라해로이로 가는 길에서 왔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라해로이에서 돌아왔다는 뜻이다.
 
라해로이로 가는 길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내를 얻었다. 만일 그가 라해로이에서 머무르고 브엘세바나 헤브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리브가와의 만남을 놓쳤을 것이다. 그가 라해로이로 가는 길에서 돌아왔을 때, 리브가가 왔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이 아브라함이 있던 곳에서 떠났다는 것을 몰랐다. 이삭이 내려가던 길에서 되돌아온 것은 주님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누리도록 운명지어졌기 때문에 돌아왔다. 우리 모두는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내려간 후에 우리는 갑자기, 『오, 나는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되돌아온 그 시간은 리브가가 온 바로 그 시간이었다. 나는 이와 같은 많은 시간들을 체험해 왔다. 나는 아래로 내려갔었고 그러다가 갑자기,『나는 돌아가겠다.』라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오자마자 누림이 왔다.

이삭이 떠나갔던 곳에서 돌아오자마자 누림이 왔다. 합당한 위치로 돌아옴으로써 그는 아내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결혼 후에, 그와 그의 아내는 다시 남쪽으로 여행했다. 창세기 25장 11절은 아브라함의 죽음 후에, 이삭이 라해로이 우물 근처에 거주했다고 말한다. 내려간 결과, 그는 블레셋 인과 반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삭에 대한 기록에 나타난 분명한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애굽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블레셋인들의 땅인 블레셋으로, 남쪽으로 갔다. 창세기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남쪽으로 갈 때마다 어려움을 당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와 블레셋인들의 땅에서 괴로움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삭도 블레셋으로 내려갔을 때 괴로움을 당했다. 왜냐하면 그는 블레셋 인들과 반목했고 다투었기 때문이다. 그는 르호봇에서 넒은 길, 넓은 곳을 누렸지만 그곳에서는 주님의 나타나심이 없었다.
 
라해로이, 에섹, 싯나, 르호봇에서는 주님의 나타나심이 없었다. 주님은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올 때까지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이삭이 르호봇에서 브엘세바로 올라온 그날 밤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26:23-24). 여기서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하게 알고 있지 않은 중요한 점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어떤 누림을 누리도록 예정되어 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가 옳든지 그르든지, 우리는 누림을 갖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삭은 라해로이로 내려갔던 때조차도 여전히 우리를 지키시는 살아 있는 분의 우물과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나타내는 우물을 누렸다. 어떤이들은, 『이것은 경이롭다. 내게 살아 계신 분이 있고 그분이 나를 지키고 나에게 그분 자신을 나타내는 한, 그것으로 아주 족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16장 14절에 처음으로 언급된 라해로이는 하갈이 사라에게서 도망한 후에 갔던 곳이다. 사라는 은혜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도망한 하갈의 도망은 그녀가 은혜의 위치에서 떠났다는 것을 뜻한다. 광야에서, 고통의 장소에서 하나님은 그녀를 방문하셨다. 그러므로 라해로이는 은혜의 위치를 떠난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방문인 어떤 은혜를 가질 수 있는 장소였다. 과거에 우리는 우리의 위치가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을 것이고 우리가 은혜의 위치에서 다소 옮겨졌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비록 우리 안에 이러한 의문이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떤 누림을 가졌고 우리 자신을 위로하면서, 『만일 내가 나쁘다면, 나는 이런 누림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를 방문하는 살아 있는 분의 우물이 있다.
 
내가 이러한 누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곳은 옳은 곳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한편으로, 우리는 누림을 위해 예정되었고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서 어떤 누림을 가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잘못된 위치에서도 이 누림을 가질 수 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었던 곳이 아니라, 하갈이 은혜로부터 도망한 곳이다. 라해로이는 은혜에서 도망한 사람이 있었던 곳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방문인 어떤 누림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곳이다. 우리 중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가졌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어떤 누림을 가졌고 그 누림에 의해 확인을 받았다. 이 누림을 확증으로 취하지 말라. 누림이 우리의 운명이지만, 우리는 브엘세바 아닌 합당치 않은 땅 브엘 라해로이에서도 그 누림을 가질 수 있다.(창 LS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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