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의 적용(6)- 싸움꾼이 되라!
진리의 언덕
2014-01-15 , 조회 (72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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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믿는 이들 가운데 한 가지 잘못된 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떠한 공격에도 반응하지 않고, 침묵하고, 
당하고, 피해를 감수해야 바르게 믿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런 관념이 생기게 된 것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빰도 돌려대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도 가 주라는 주님의 권면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영화나 교회역사 기록을 통해 사자에게 먹혀 죽을지언정 
저항하지 않았던 순교자들에 대한 어떤 인상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권면이 있고 이런 것이 믿는 사람들의 한 방면의 특성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모두 항상 이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표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또 다른 방면의 믿는 이의 특성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싸우는 자로서의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에게도 어린양으로서 묵묵히 희생당하는 면이 계신 반면(요1: 
29), 유다 지파의 사자(계5:5 )로서의 방면도 있으십니다(창49:8-9). 
유대지파의 사자로서의 주님이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펴고 인을 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있어서 '싸우는 사자'로서의 자격이 요구된다 
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입니다. 사실은 이 두 가지를 고루 갖출 때 균형잡힌 
믿는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선한 싸움을 싸워왔다(have combated)고 말하고(딤후4:7), 
디모데에게도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했습니다(딤전1:18,6:12). 
그렇다면 이 선한 싸움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수립을 
위해 우리의 공통대적인 사탄과 그의 어둠의 왕국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탄이 눈멀게 한 가리워진 생각(관념)과 싸우는 것입니다. 
더 실제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경륜-그리스도 자신을 사람 안에 분배함으로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것-을 보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면 손해나 
손실이 오는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이제 이러한 실례를 고후10:1-6 을 중심으로 조금 더 살펴 보겠습니다. 

1. 발단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고 양육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경륜과 다르게 가르치는 어떤 사람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할 만큼 서로 아끼고 사랑하던 관계가 
서서히 식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을 비난하며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직접 만나보니 몸도 약하고(고전2:3, 고후13:4)직접 만나서 말을 
들어보니 언변도 없다(contemptible)고 깍아 내렸습니다(고후10:10). 

자. 우리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침묵하며 묵묵히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래 당신들 말이 다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못나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 만일 내가 당신들을 돌보는 일에 
더 이상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후임자를 물색해 보라 이렇게 해야 할까요? 

더구나 그들은 몸이 약한 것, 말이 시원치 않은 것 등등 생각하기에 따라 
인신공격에 가까운 내용들을 문제 삼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찌하든 성경은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명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핵심부 
요새를 강타하는 식으로 반응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 

첫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깍아 내리는 것이 거짓사도(또는 사단의 
일군 또는 지극히 큰 사도)(고후11:13, 15, 5)의 영향을 받은 결과임을 간파 
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일군이 조종한 일에 대해 '십자가와 죽음'으로 착각된 
침묵과 무대응은 곧 영적 패배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수고하여 얻은 
사역의 열매(성도들)가 훼손 당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사도성의 권위가 훼손됨으로 앞으로 그들에게 사역할 문이 닫히는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익의 훼손으로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기 집에 든 도둑이 가족을 해치고 기물을 손상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미덕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사람에게 이것도 가져 가라고 하고 저것도 집어준다고 주님의 인격이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 도둑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더 나아가 주인에게 용서를 빌도록 
돕는 것이 참으로 그를 위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진리와 비 진리 사이에 끼어서 
방황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성도들의 상태로 확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비진리를 진리로 착각하고 세월을 허비하 
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약간의 저항과 반대가 있더라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담대하게 밝히는 것이 참으로 그분들을 위한 태도가 될 것입니다. 공연히 다른 
사람들 괴롭히거나 분란만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당신이나 잘 믿으라 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태도와 다른 것입니다. 


3. 바울의 공격적인 조치 

그는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공격에 대해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I be rude in speech),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 라고 반박했습니다 
(고후11:6). 그리고 '왜 너희들은 외모로만 사람을 보냐.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믿는다면 우리도 그리스도께 속 했으니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촉구했습니다(고후10:7). 

그러나 이런 공방이 일반적인 말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며 바울의 
승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내용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읽혀질만큼)은 
그가 육체대로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리고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부수려고 함이 아니요 세우려는 
목적으로 변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이나 기독교계 변증 분야에도 말 잘하는 사람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가 논리와 언어구사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는 어떤 토론에서 판 정승을 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때 육체 안에서 자신의 천연적인 지혜를 사용하고 상대방을 파하려는 
(destruction)의도로 싸움으로 그 결과는 하나님의 권익과 무관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소의 사울이 그런 자 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살지 않고 그리 
스도의 미덕으로 변증한 바울의 말은 싸우고 변명한 내용조차도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합니다. 


4. 바울의 공격 목표 

하나님의 경륜의 수행을 위해 임명된 사도바울의 고후 10장에서의 공격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람의 변화 받지 못한 생각 또는 관념 
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견고한 진'(strongholds)이라고 말했습니다(4절). 
더 풀어서 말한다면 이것은 생각에서 파생된 '모든 이론'(reasonings),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심지어 (변화받지 못한) '모든 생각들'(every 
thought)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빌2:14, 딤전2:8, 사2:11-12, 고후11:3, 3:14, 사6:9-10등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실제로 사탄(이 세상 신)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thought,노에마 3540)을 
혼미케 하여(hath blinded) 복음을 받지 못하게 방해합니다(고후4:4). 
그리고 이방인들이나 이방인들처럼 사는 성도들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vanity) 
을 따라 살게 조종합니다(엡4:17, 2:2). 

사탄은 겉으로 보면 허여멀겋고 말쑥한 신사도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영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총명이 어둡고 무지하여 마치 바보처럼 반응하게 합니다. 
다른 방면에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고 영적 체험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경륜에 
관련된 방면에 있어서는 고집 센 말과같이 완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한 편으로 계시의 빛이 비취어 깨닫도록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필요 
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처럼 그들의 참 상태가 무엇인지를 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고후10-13장).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례가 생각납니다. 

진리에 밝은 한 형제가 우연한 기회에 집회소에 들른 모 교단 강도사와 
대화를 하게 되었답니다. 생각지 않게 이야기가 길어져서 둘은 그 형제님 
집으로 갔고 밤새도록 진리에 대해서 얼굴을 붉히는 지경에 가도록 토론했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고 
선택된 특정인만을 위해 피흘려 죽으셨다는 주장을 했답니다. 당연히 그 진리에 
밝은 형제는 우리 구주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설파했습니다. 
서로 자기가 아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 들이대며 격론을 벌이다가 새벽 녁에 
그 강도사는 주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사실을 성경을 통해 받아들이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상태에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번은 교파에서 신학을 하고 전도사를 하다가 교회생활을 하게 된 형제님하고 
같은 소그룹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신실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도 
'쎄게'하는 매우 좋은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움은...이 형제님은 
자기는 사람이 쓴 책은 안 읽고 성경 만 읽는다는 것을 고집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신학교에 있을 때도 주석 책은 절대 안 봤다며 사람이 쓴 모든 책을 
거부했습니다. 얼른 들으면 틀린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성경만을 읽는다는데 나무 
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만 읽는 그 형제님에게서 나오는 신언의 
말 내용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성경 본문만을 외워서 인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어떤 나름대로의 해석적인 관점을 제시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형제는 엉뚱한 
해석을 내 놓기도 했습니다. 지체들은 인내하면서 품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성질 급하거나 참으로 그 형제를 위하는 지체들은 찾아가서 그의 태도가 취우친 
것임을 알려주기를 몇 해 째.... 지금은 매우 균형 잡힌 달콤한 형제님이 되어 
계십니다. 

사실 이 문제는 그 형제님이 사도 행전 8:28-31에서 빌립과 이디오피아 내시의 
대화만 잘 이해했어도 쉽게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위 두 가지 사례는 사람 안에 한번 굳어진 어떤 관념은 참으로 강력한 진과 
같아서 그것을 더 큰 빛으로 깨뜨리지 않으면 계속 그를 가리우는 수건이 되어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고후3:14-15). 
그리고 그 배후야 흑암의 권세를 가진 영적 실체들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어떤 
사람들과의 싸움임을 보여 줍니다. 


사실 개인적인 영성만을 관심하거나 적당히 믿는 사람에겐 싸울 일이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번거롭고 고단한 수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주님자신을 사람들에게 공급함으로 우주가운데 한 몸을 
건축하시려는 하나님의 갈망과 하나되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일의 성취를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다 바치겠다고 서원해 보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생명을 관심하고 
주님 이외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생명의 흐름을 막는 것들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영적 싸움'이 실감날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진도가 나갈 수 있는지'도 뼈저리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는 '다윗의 사자' 닮은 
꼴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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