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의 적용(8)-죽고 사는 문제이다.
진리의 언덕
2014-01-16 , 조회 (70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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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누가 했다면 어떤 답변이 나올까요? 아마 제 눈에 안경이라고 저마다 자신이 
중요시 했던 방면들이 강조되어 설명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을 사해주셨다고 할 것이고 
어떤 단체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 내셨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약한 자, 눌린 자, 소외된 자를 돌보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식의 답변이 예상되는지요? 각자 마다 어떤 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듣고 배운대로 그리고 양심 안에서 참으로 그렇다 라고 아멘이 되는 
방식대로 답변해 보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1) 인생을 사셨고 
2) 죽으셨으며 3)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런 답변이 어떻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런 답변을 듣고 '에이 뭐 그런 식의 설명이 있나'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너무 포괄적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답변의 세부 항목들을 설명 들은 후 '와~우 그거 말 
되네' 라고 승복하고 말았습니다. 



간략하게 그리고 조금만 그 설명을 소개드리자면.... 

주님은 <인생>을 사셨는데 그 의미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살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처럼 '인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 다윗, 
모세까지도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표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인간 
적인 약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삶의 궤적들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신 것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그렇고, 거센 파도 
가 일렁이는 폭풍우 속에서 배 한 쪽에서 주무신 것도 그렇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서 물 좀 달라고 말을 건네신 것이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예수 믿는 사람 
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 우리의 본이셨습니다(벧전2:21). 

오! 이런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삶은 얼마나 제 마음을 감동시키고 도전을 주는 
것이었던지요. 이것을 본 이후 저는 사복음서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 
셨다는 말은 너무나 일반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의미하는 것 또는 그 죽음을 통해 성취하신 사실들을 알고 나면 이 예수님의 
죽음 또한 깊은 감상과 누림의 대상입니다. 주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느냐고 누가 질문한다면 제일 먼저 나올 법한 답변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그분이 우리 '죄들'(sins-복수)을 사해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고전15:3, 벧전2:24 등 숱한 구절들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 뿐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더 많은 것들을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롬8:3은 '죄'(Sin)가 그분의 육신 안에서 정죄되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도 그 때 죽었습니다(롬6:6). 세상임금인 '마귀'가 그 때 처리 
(무효화 시킴)되었고 '세상'은 심판을 받았습니다(요12:31, 히2:14). 이것 뿐이 
아닙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의문에 속한 계명의 규례들을 폐하셨습니다 
(having abolished).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는 순간이기도 하셨습니다 
(요12:24). 그외에도 더 있지만... 

이런 진리의 지식들 중에 어떤 것은 깊은 체험까지 연결되고 어떤 것은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항목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이 깊어 갈수록 예수님이 
이미 죽음을 통해 이뤄놓으신 이러한 '사실'들은 점점 나의 체험으로 다가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일을 성취하셨을까요? 부활이면 그냥 
주님이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이지 성취는 무슨 성취냐고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독생자이시면서 부활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롬1:4, 행13:33, 롬8:29).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셨다. 거룩케 하는 자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한 근원)에서 났다 
라는 말씀은 매우 깊고 비밀합니다(히2:11). 부활은 또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눈에 일시에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게 했습니다(벧전1:3). 에베소서 2:6은 
이와 관련된 매우 깊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부활시 '생명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그러나 오늘 날 소위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경 전체가 계시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깨닫고 그 실재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적 죽음으로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옛창조를 끝내고 부활 안에서 
새창조를 산출하신 이 비밀(갈6:15)을 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에 맞추어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을 읽다가 주님이 자신의 죽음을 세번이나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에 깊은 만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었습니다. 


첫번 째 언급은 마16:21에서 입니다. 

이것은 그 앞 부분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과 음부의 권세(문들)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오셨음을 계시하신 직후였습니다. 

성경은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때 소위 수 제자라고 알려진 베드로의 반응은 매우 흥미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고 지지해야 할 그가 보였던 반응은 사실은 
옛사람 안에서의 우리 모두의 반응일 것입니다. 사탄은 다른 것은 그냥 그냥 
내버려 두고 묵인하다가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화악 몸을 일으켜 반응하는 
것을 우리는 한 두번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16:22-27까지의 주님의 뼈있는 
말씀은 우리가 액자에 써서 걸어 놓고 매 순간 바라보며 묵상할만 합니다. 


두번 째 언급은 마17:22-23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변화산에서의 변형 사건 이후에 말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겐 이런 말들이 큰 근심거리였습니다(were exceeding sorry). 
그들은 이런 말을 들은 직후에 뜬금없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이나 하고 
있었습니다(마18:1). 


세번 째 언급은 마 20:18-19 입니다. 

성경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 나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능욕하고' 라고 안 하시고 '그를 능욕하고'라고 하심으로 십자가 
의 죽음의 과정을 객관화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십자가 
에 달려 죽는 문제는 예수님에게도 그냥 턱하니 달려서 죽어버리면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을 우리는 그분의 간절한 기도내용 
에서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마26:37은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고민하고 슬퍼하셨다'(began to 
be sorrowful and very heavy)고 적고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주님은 
'내 혼(My soul)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9절에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민이 되셨으면 이런 동일한 기도를 세번이나 하셨겠습니까? 

또한 히5:7은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with strong crying and tears)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 
경외하심을 인해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대목이 성경에 쓰여있다는 자체가 기이합니다. 아니 죄인들을 위해 
죽으러 오셨으면 그냥 구세주답게 묵묵히 죽으시면 되지 무슨 예수님답지 않게 
슬프고 고민이 되는가, 또 민망하게 그런 것 가지고 울기까지 하시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은 죄만 없으시지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셨음 간과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음을 통해 짊어진 
죄악과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무겁고 가혹한 것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그러한 길을 가셨음으로 우리도 소망이 있고 
또 그분이 더욱 존귀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이제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리고 이미 성취된 사실들이 왜 우리에게 
다시 읽혀지고 묵상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을 되새겨 볼 시간입니다. 

그것은 마16:24, 롬8:13, 벧전2:21, 갈5:16, 24-25 등을 볼 때 에수님의 십자가 
와 부활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구속의 죽음의 방면을 이룰 수 없다는 것 뿐입니다. 

사실 오늘 날 그리스도의 몸이 이처럼 더디 이뤄지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인 
십자가의 죽음의 기회를 많이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말로는 십자가를 
외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지도록 꾸물거릴 때도 있습니다. 마치 함께 
밥 먹으로 식당에 가서 다 먹은 다음 내가 낼께 말은 하면서 구두 신는 시간을 
최대한 끌어 그 사이 성질 급한 다른 사람이 계산하게 하는 식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옛 사람, 옛 창조로는 새 사람, 새 창조 
를 만드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의 뜻을 알아 그분이 가신 길을 갈 수 있습니까? 

1) 자신의 뜻을 꺽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2) 자기 부인의 상황과 환경이 닥쳐 왔을 때 그 문제를 가지고 궁리하지 않고 
주 앞에 나아가 땀 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정 지방의 교회나 특정인의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수레 
바퀴가 앞으로 굴러가게 하려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들에게 먼저 
적용하려는'한 무리의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왜 어떤 지방에서는 주님 
의 빠른 전진이 있고 어떤 지방은 소리만 요란할 뿐 자꾸 헛 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줄까 깊이 고민한 필요없습니다. 아마도 그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깊고 간절하며 절대적인 기도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에 관한한 기도없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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