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다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2014-04-11 , 조회 (1305)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이것은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롬 8:4)   
  
That the righteous requirement of the law might be fulfilled in us, who do not walk according to the flesh but according to the Spirit.(Rom 8:4) 

우리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다. 가령 몸집이 크지 않고 오십 근밖에 질 수 없는 한 형제에게 열 근을 더 지게 한다면 그는 지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한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 밖의 일을 할 수 없다. 그가 이미 오십 근을 지었다면 열 근을 더 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이미 진 오십 근이 그의 수중에 든 일이다. 이것은 육신의 힘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 육신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 겉사람의 힘도 한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힘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깨달았지만 그들의 겉사람의 힘도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겉사람의 힘을 낭비해 버린다. 가령 어떤 사람은 그의 부모를 사랑하는 데 그의 힘을 다 쏟는다. 그래서 그는 형제를 사랑할 힘이나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할 힘이 더 이상 없게 된다. 그의 힘은 그 정도뿐이고 또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다른 데 쓸 힘이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각도 한계가 있다.

어느 누구도 무한량한 생각을 가질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어떤 일에 주의를 많이 갖고 그 일에 생각을 많이 두었다면 그에게는 다른 일을 생각할 여력이 없게 된다. 로마서 8장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효능을 발하지 못하는가? 성경은 영을 좇아 행하는 너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준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영에 속한 사람에게만 효능을 발휘한다. 그러면 누가 영에 속한 사람인가? 신령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영에 속한 사람이다. 신령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육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육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이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하다’는 ‘유념하다’ 또는 ‘주의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가령 어느 어머니가 외출할 때 아기를 친구에게 위탁하면서 “나를 위하여 아기를 주의해 주려무나.”라고 말했다 하자.

 아기를 주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기를 계속 주시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한 가지를 유념할 수 있을 뿐 두 가지를 유념할 수 없다. 누가 당신에게 아기를 맡길 때, 당신은 아기를 주의하면서 산에 있는 소와 양을 동시에 관심할 수 없다. 아기를 관심할 때 다른 일을 또 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육신의 일을 유념하지 않는 사람만이 영의 일을 유념할 수 있고 영의 일을 유념하는 사람만이 성령의 법의 효능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생각의 힘은 한계가 있다. 우리가 육신을 위해 생각의 힘을 다 써 버렸다면 영적으로 우리는 우리 생각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따라가지도 못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일에만 유념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영의 일에 유념할 힘이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 겉사람의 힘이, 유한(有限)한 두 어깨와 같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수중에 든 일이 있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수중의 일이 있는 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힘도 그만큼 감소된다. 수중의 일은 진실로 하나의 장애요 아주 큰 저해 요소이다. 가령 어떤 사람의 감정에 수중의 일이 있다 하자. 그가 여러 가지 분란한 사모함과 바람이 있어서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하며, 이것과 저것에 대하여 다 느낌이 있을 정도로 수중의 일이 많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요구가 임한다면, 그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감정을 다 써 버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하루 이틀간 필요한 감정을 다 써 버렸다. 이틀이 지나야만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의 감정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코 무한하게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 의지가 강하고 그 됨됨이도 매우 강인하다면 그 사람의 의지가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강인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는 의지가 우유부단하여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한다. 겉보기에 그는 강인한 사람 같지만 하나님의 일에서 의지를 사용해야 할 때 보면 참으로 의지를 사용할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자기 주장을 잘 내세운다. 그는 어떤 일에서든지 자기의 주장을 갖고 이랬다가 또 저런다. 그러나 정말 영적인 일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때 그는 우유부단하고 속수무책이며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를 모른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원인은 그의 겉사람이 수중에 든 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손과 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어서 이것에 의해 그의 온 존재가 소모되고 그의 겉사람의 온 힘이 다 사용되고 소모되었다. 우리 겉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수중의 일이 있을 때 우리 겉사람은 제한을 받게 된다.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제 3장)

요구 한계,로마서 8장 4절,수중 한정,여력 효능,발휘 유념,장애,감소 분란,우유부단 주장,판단 소모,제한 겉사람

트랙백:  수신불가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