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에 속한 그리스도인
영에 속한 사람
2014-05-11 , 조회 (126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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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십시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 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 생명을 잃으면  혼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마 16: 24- 25).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ants to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For whoever wants to save his soul-life sha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soul-life for My sake shall find it.(Matt. 16:24-25)  

이것은 왜 그런가? 이는 십자가의 일에 의해 믿는 이의 죄스런 성품이 이미 처리되었으나 그의 혼 생명(사람은 영, 혼 몸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혼은 생각, 감정, 의지 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음. 우리의 혼 생명이 우리의 '자아(자기)'입니다.)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범죄가 죄의 본성에서 나오고, 혼은 그것의 명령을 따르고 힘만을 제공하지만 사람의 혼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더러운 것이 아닐 수 있으나 아담의 타락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이것은 천연적인 것에 속하며 하나님의 생명과는 다른 것이다. 믿는 이들 속의 더러운 옛사람은 이미 죽었지만 그의 혼은 여전히 그의 생활의 능력이다. 비록 그가 죄의 본성에서는 벗어났으나 자아의 생명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혼에 속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비록 옛사람이 더 이상 혼을 주장하지 않게 되었지만 혼은 여전히 사람의 생활 능력이다.

이제 하나님의 성품이 죄의 성품을 대치하였기 때문에 그의 모든 취향과 애호와 주장은 다 선하고 전과 같이 더러운 것은 아니나 이 새 성품을 집행하는 주장과 애호는 전의 혼 생명과 다를 바가 없다. 혼을 의지하는 이 생명으로 영의 주장을 집행하는 것은 자연적인(세상적인) 힘으로 초자연적인(하나님에 속한) 선을 이루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자아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믿는 이의 상태로는 이미 죄를 이겼지만(소극적인 면) 의를 행하는 것(적극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어리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과 어림과 쓸모없음을 진심으로 시인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사람의 본성은 스스로 능력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겸손해지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령을 의지하여 의를 행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또한 자아(혼)의 능력으로 과거의 그의 모든 행위를 개선하려고 한다. 이때의 위험은 바로 성령의 능력 주심으로 새 성품의 분부를 집행하려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데 있다. 사실상 이때에 그의 영적 생명은 아직 성장하지 않은 갓난아이같이 하나님의 성품의 미덕들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기다림과 겸손과 의뢰하는 마음이 결여됨으로 자신의 소행이(사람이 보기에)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천연적이고 혼에 속한 능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그분의 자녀에 대한 모든 요구 조건을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소행과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 속한 것의 혼합이다.

이는 하늘의 소원을 땅에 속한 능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믿는 이의 소행은 여전히 영에 속하지 않고 혼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은 혼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사실 간단히 말해서 혼 생명은 다름이 아닌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자아 생명이다. 많은 믿는 이들은 죄와 자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큰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죄와 자아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나 영적인 체험에서나 죄와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모른다. 죄는 더럽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완전히 악한 것인 반면에 자아는 꼭 더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악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도리어 많은 경우에 자아는 아주 아름답고 하나님을 도우며 아주 사랑스러운 것이다. 예컨대 성경을 읽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경을 읽을 때 자아의 소행으로 가득할 수가 있다. 자기 총명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죄는 아니나 자아의 소행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계획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자기 방법대로 일하는 것은 자아가 충만한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영적 생명의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죄가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추구도 혈기의 자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혹은 남보다 뒤떨어지기가 싫어서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영적 상태의 진보가 어느 정도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자신으로 무엇인가를 얻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선을 행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선행 속에도 자아가 가득하다.

어떤 때에 사람이 행한 선은 개인의 천연적인 선일 뿐 거듭날 때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부터 자상하고 참을성 있으며 온유한 것과 같다. 그의 자상함과 인내와 온유는 천연적인 것이고 혈기에 속하고 자아에 속한 것이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자상하고 인내하며 온유한 반면에 범죄하지 않고 그것들이 죄가 아닐지라도 자아 생명의 행위가 그 안에 충만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 행해진 선은 의지할 데 없어서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기를 간구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의지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죄와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 주는 간단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영적 노정에서 더 진보했다면,

많은 일에 죄가 끼어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아가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상 자아는 가장 거룩한 일과 가장 영적인 생활에도 섞여 있을 수 있다. 믿는 이가 죄로부터 해방받는 체험을 가진 후에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위험 요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옛사람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죄’의 몸은 시들어졌지만 ‘죄’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모른다. ‘죄’는 이제 왕위를 잃은 왕같이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힘써 자기 자리를 복구하려고 한다. 이것은 믿는 이가 ‘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계속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온전하여졌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그가 계속적으로 처리받아야 할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영에 속한 사람 3부, 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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