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
에베소서
2014-06-19 , 조회 (215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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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해 주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그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엡 1:17-18)

That the God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glory, may give to you a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in the full knowledge of Him, The eyes of your heart having been enlightened, that you may know what is the hope of  His calling, and what  are the riches of the glory of  His inheritance in the saints,(Eph.1:17-18) 

에베소서 1장 18절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따라 우리는 두 가지-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를 알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에 있는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을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갖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 알아야 될 첫째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었다. 2장 12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서, 우리는 더 이상 소망없는 외인이 아니다. 오히려 소망이 충만하다. 그런데도 많은 믿는이들이 그들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갖게 하기 위해 기도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로서, 소망이 충만하다. 우리의 소망은 첫째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영광의 소망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 되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과 거룩함일 뿐 아니라 우리의 소망도 되신다. 우리의 소망은 유일하게 그리스도뿐이다. 우리의 소망의 모든 측면들이 그분과 관계되어 있다.

우리 소망의 두 번째 측면은, 땅에 속한 물질적인 영역에서 하늘에 속한 영적 영역으로 황홀하게 옮겨지는 것과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롬 8:23-25, 빌 3:21). 황홀 상태란 미칠듯이 기쁜 것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황홀한 상태란 들림받음을 가리킨다. 성경 교사들은 이 단어를 들림받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 그 이유는 들림받는다는 것이 일종의 황홀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그들의 들림받음이 황홀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만일 주님이 오늘 오신다면 당신은 행복하겠는가? 당신은 황홀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인가, 아니면 울부짖음 속에 있겠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울거나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들림받음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의 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이 소망은 우리가 주님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으로 살고,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우리의 들림받음은 황홀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 살지 않거나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과연 황홀하게 될 것인가가 의심스러워진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들림받음에 대한 문제를 느슨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이 다시 오시면 들림받을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극장 안에 있거나, 부인이나 남편과 싸우고 있을 때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처지 속에서 들림받음이 황홀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다투고 있기를 원치 않는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했다.

이는 디모데가 주님의 나타나심의 빛과 그분의 왕국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가리킨다. 무엇이든지 장래에 왕국에서 거절될 것은 오늘 우리 생활 안에서도 거절되어야만 한다. 나는 우리 중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많은 이들이 주의 나타나심 안에서 살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나타나심 안에서 산다면, 분명 다툼을 멀리할 것이고, 주님이 나타나실 때 다투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경고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신약을 읽어보면, 특히 서신들에서 사도들은 주님의 나타나심에 유의하여 생활했음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나타나심은 그들에게 계속적인 경고가 되었고, 그들의 생활을 규제했다. 그들은 어느 때든지 주님이 나타나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일들을 감히 하지 못했다.(엡 LS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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