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의 필요―생명의 부활
요한복음
2014-06-28 , 조회 (168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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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요 11:25)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to Me, even if he should die, shall live;(John.11:25)

요한복음에 있는 표적들을 상고해 봄으로써 우리는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심을 깨달을 수 있다. 그분이 당하신 방해의 첫 번째 범주는 유대 종교였고, 두 번째 범주는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사람의 의견의 방해는 오늘날 그분의 교회 안에서도 정확히 똑같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수한 의견들이 교회 안에서 주님이 부활 생명이 되시는 것을 가장 방해한다. 교회 밖에서는 주님의 생명 되심을 막는 것이 종교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주님이 우리의 생명 되심을 방해하는 것은 끝없는 의견이다. 이 아홉 가지 사례들은 생명이신 주님이 거듭남에서 시작하여 부활로 끝남을 보여 주기 때문에 매우 의미 깊다. 이 모든 사례들은 몇 가지 다른 면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심을 상징하는 표적들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을 체험함은 거듭남에서 시작하여 부활로 절정에 이른다. 

주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고 말씀하셨다. 부활은 생명보다 뛰어나다. 생명 그 자체로는 오직 생존할 수 있으나 부활은 모든 종류의 공격, 심지어 사망의 공격도 견딜 수 있다. 주님은 생명일 뿐 아니라 부활이시다. 그분은 사망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에 사망은 그분을 붙잡을 수 없다. 그분은 생명일 뿐 아니라 부활이시기 때문에 사망은 그분을 억누를 수 없다. 생명은 생존하는 능력이지만 부활은 생명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능력이다. 부활은 생명을 대항하는 모든 공격을 격퇴시킬 수 있으므로 생명보다 뛰어나다. 성경에 의하면, 사망은 큰 능력이다. 사망이 사람에게 올 때 그는 빠져 나올 수 없다. 심지어 원자력도 사망을 이길 수 없다. 오직 부활이신 주님 자신만이 사망을 격퇴시킬 수 있다.

그분은 생명일 뿐 아니라 부활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사망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 그분은 부활이시기 때문에 사망의 능력을 깨뜨릴 수 있다. 심지어 음부도 우리 주님을 무덤에 가둘 수 없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이 부활 생명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생명이신 주님에 의해 살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부활이신 주님에 의해 정복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환경은 사망처럼 우리를 침범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주님이 부활인가 아닌가를 증명하기 때문에 사망의 맛을 포함한 이것들은 시험이다. 이를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는 우리의 부활 생명이신 주님을 소유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우리를 가둘 수 없다. 어떤 압력이나 문제가 있더라도 우리에게 부활 생명이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11장 25절에 따르면, 주님은 우리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부활이심을 온 우주에게 증명할 것이다! 사탄은 우리를 사망 안에 영원히 넣어 두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을 수 있으나 어느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다. 온 우주 가운데서 이것은 주님이 부활이심을 증거하는 가장 큰 승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최종 승리를 미리 맛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능력을 알려 하여』(빌 3:10)라고 말했다. 사람의 의견은 항상 교회 안에서 부활 생명이신 주님을 체험하는데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사람의 의견이 포기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의견을 발표하지 않고 잠잠하기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심지어 우리는 마리아보다 더 잠잠해야 한다. 우리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 알려야 한다. 이것이 전부이다.

그럴 때 나사로는 구원받을 것이다. 주님이 대답을 하시든 안 하시든 그분이 오시든 안 오시든 우리는 다만 잠잠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일들을 주님의 손에 완전히 맡긴다. 그럴 때 우리는 결코 잘못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은 결코 늦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오실 때 우리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만 그분으로 말씀하시게 해야 하며 그분이 원하는 것을 하실 수 있는 기회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다만 그분과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 생활을 하는 합당한 길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부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것이다. 이 장이 교회 생활과 관련될 때 매우 의미 깊다. 주님은 부활 생명으로서 교회에 오신 분이지만 거기에 두 범주의 방해들이 있다. 하나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의견이다.

심지어 종교인 기독교도 생명을 가져오는 주님의 목적에 절대적으로 방해된다. 오늘날 종교적인 기독교를 포기한 그리스도인들의 소위 자유 단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교파와 또 다른 기독교의 조직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 단체들 안에서도 사람의 의견은 얼마나 끝이 없는지? 거기에 종교 같은 것은 없더라도 사람의 의견이 주님의 길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를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견을 거절하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속에서 생명이 되시도록 자유로운 길을 주님께 내어 드릴 것이다.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때 그분은 살아 있는 교회를 소유할 것이다. 종교와 의견은 우리 생명이신 주님이 흐르는 것을 방해하는 두 개의 주된 범주임을 기억하자. 이 마지막 사례에서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원칙을 발견해야 한다.

 2장에서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변케 하는 첫 번째 표적을 보았다. 4장에 있는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죽어 가는 아들을 살리신 것이었다. 이 복음서에서 성령의 의도는 주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생명이 되게 하는 것임을 여러 번 언급했다. 2장과 4장에 있는 이 두 비유는 사망에서 벗어나는 생명의 원칙을 계시한다. 모든 아홉 가지 사례에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부활의 영역 안에 있는 생명의 원칙이 있다. 이제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표적이 왜 「표적의 시작」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는 모든 중요한 원칙을 포함한다. 이것이 모든 아홉 가지 사례에 있는 기본 원칙이다. 모든 사례에는 오직 사망을 상징하는 물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망의 물일뿐이며 사망의 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요 LS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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