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儀文)에 있는 밖의 형식만 지킴
로마서
2014-07-01 , 조회 (36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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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외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외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고, 할례는 마음에 있는 것이어서 영 안에는 있고 율법 조문에는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롬 2:28-29)

For he is not  a Jew who is one outwardly; neither is circumcision tat which is out ward in the flesh. But he is a Jew who is one inwardly; and circumcision is of  the heart, in spirit, not  in letter, whose praise is not  from men, but  from God.(Rom.2:28-29)

종교인들 가운데는 의문에 있는 외적인 형식만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2:27-28). 세례(洗禮)를 예로 들어 보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침례(浸禮)에 의한 세례를 주장하고 있다. 나도 성경에 이른 대로 침례에 의한 세례를 전적으로 찬성하는 바이며 한번도 사람들에게 약세(略洗)로 세례를 베푼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세례가 거의 하나의 외적 형식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외적인 형식들은 모두 피해야 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만일 그들의 할례(割禮)가 외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진정한 할례라면 내적인 것이며 마음과 영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침례라는 단어를 놓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의미에서, 침례는 할례를 대치(代置)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의 할례는 신약에 와서 침례로 대치되었다. 할례가 단지 외면적으로 행해지는 한 그것은 헛된 것이다. 이처럼 침례가 단지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실제가 될 수 없다. 거의 모든 세례가 한낱 외적인 형식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경험으로 예를 든다면 맨 처음 나는 어떤 목사로부터 약세를 받았다. 그 후 나는 이것이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다음 나는 어떤 형제회의 교사에 의해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침례를 받은 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민물에서 받지 않고 짠 바닷물에서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틀렸다고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예수님의 본(本)을 따라서 강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어떤 목사는 그것은 요단 강이 아니기 때문에 또 틀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다 해도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으셨던 정확한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틀렸다고 어떤 사람이 또 따질지도 모를 일이다. 논쟁은 끝이 없다. 비판은 치우친 행동이며 합당치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침례에 관하여 논쟁과 분쟁을 일삼아왔다. 그 이유는 그들이 표면적 형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퀘이커 교도[17세기 중엽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창시한 기독교의 일파-역자 주]들이나 펜 루이스 여사(Mrs. Penn-Lewis)같은 사람들은 외면적인 육신의 침례를 부인했다. 나는 그들의 이러한 신앙을 인정하지 않지만, 당신의 견해에 따라 맞게 보이는 형식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이 아니요, 나도 물론 아니다. 당신이 더운물에서 침례를 받든 찬물에서 침례를 받든, 그 물이 소금물이든 민물이든 강물이든 바닷물이든 한 번 받든 여러 번 받든 간에 외면적 형식은 다 헛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내적 실제가 필요하다. 내가 권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겉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실제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롬 L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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