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갈라디아서
2014-08-08 , 조회 (157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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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세상은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 6:14) 
 
But far be it from me to boast except in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the world has been crucified to me and I to the world.(Gal. 6:14)
 

6장 11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이 「큰 글자」를 언급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큰 글자는 바울이 쓰고 있던 것이 중요함을 가리킨다. 큰 글자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이 서신이 중요하다는 인상을 수신인들에게 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둘째로, 큰 글자를 쓴 것은 바울의 시력이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4:13-15). 바울이 4장 13절에서 언급한 약함은 눈에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큰 글자를 썼을 것이다. 이러한 육신의 약함이 육체에 있는 가시, 즉 바울이 그에게서 떠나기를 간구했던 가시였을지도 모른다(고후 12:7-9).  12절과 13절에는 유대인의 자랑이 나타나 있다.

『무릇 육체에 좋은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회복역 참조). 12절에서 「좋은 모양」 이라는 헬라어 표현은 좋은 용모와 좋은 모양을 나타내기 위한 좋은 겉 모양과 훌륭한 과시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할례는 십자가처럼 좋은 모양이 아니라 굴욕적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육체의 자랑인 좋은 모양이 되게 했다.「육체에」라는 표현은 하나님에 의해 정죄받고 멸시받은 육체의 영역의 외견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할례는 사람이 천연적이고 외적인 존재 안에 있었을 뿐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있는 내적 실제와 영적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13절에 따르면 갈라디아인들을 억지로 할례 받게 한 사람들조차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할 수 있게 하려고 갈라디아인들이 할례 받기를 원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육체로 과시하기를 원했고, 다른 한편으로 갈라디아인의 육체로 자랑하기를 원했다.  14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사도 바울의 자랑을 볼 수 있다. 바울은 14절에서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는 진실로 굴욕이지만 바울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세상은 우리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우리도 세상에 대해 그러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15절의 설명을 볼 때, 여기서의 세상은 주로 종교적인 세상을 언급함이 증명된다. 15절 서두의 「무릇」(우리말 성경에는 영어의 for에 해당하는 무릇이라는 말이 번역되어 있지 않음-역자 주)이라는 단어는 이 구절이 앞 구절의 설명임을 가리킨다. 더욱이 할례는 종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14절에 있는 세상은 종교적인 세상을 가리킨다. 15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새 창조뿐이니라』(회복역 참조).

11절부터 14절까지에 연이어서 이 구절을 생각해 볼 때, 여기에서 바울의 관심은 주로 세속적인 세상이 아닌 종교적인 세상에 있음을 알게 된다. 갈라디아의 믿는이들을 억지로 할례 받게 한 사람들은 그들을 세속적인 세상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육체로 과시하고 핍박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의 믿는이들을 종교적인 세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구절에서 다룬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세속적인 세상이 아닌 종교적인 세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4절에 있는 세상이 종교적인 세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종교적인 세상이 바울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바울도 종교적인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종교적인 세상은 바울과 아무 상관이 없고, 바울도 종교적인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15절에서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새 창조뿐이라고 말한다. 옛 창조는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옛 사람(엡 4:22), 즉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한 본성이 없는 우리의 타고난 천연적인 존재이다. 새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엡 4:24), 즉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 안으로 역사한 거룩한 본성을 가진(요 3:36, 벧후 1:4), 그리스도를 구성 요소로 하는(골 3:10-11), 그 영에 의하여 거듭난(요 3:6) 우리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바로 이 새 창조이다. (갈 LS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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