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궁의 계시 (아 1:5-7)
노래 중의 노래
2014-08-09 , 조회 (150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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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1:5)

I am black but  lovely, O daughters of Jerusalem, Like the tents of  Kedar, like the curtains of Solomon. (S.S. 1:5)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과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원문 참조). ‘예루살렘의 딸들’은 어떤 류의 사람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시(詩)이므로 여기의 예루살렘은 결코 땅 위의 예루살렘이 아니고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이 처녀들이 하늘의 예루살렘 영역 안에 있는 한, 그들은 틀림없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녀들을 딸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그녀들은 하나님이 낳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다지 추구하지 않으며 아주 냉담하고 모호하며 마음대로 하는 한 무리의 사람일 뿐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녀들은 구원받기는 했지만 간신히 구원받은 사람들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그녀가 침궁에 있은 결과, 먼저는 자신이 검다는 것을 보았다. 추구가 없으면 볼 가능성조차 없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았다. 그녀는 아마도 이 검음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 검음은 검게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검은 것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사랑하는 자 안에서 자신이 열납받는 것도 본다. 그러므로 그녀는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라고 말한다. 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열납받는 것을 가리킨다. 

 “게달의 장막과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게달’은 ‘암실’이라는 뜻이다. 게달의 장막과 같다는 것은 외면이 검고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휘장’이 만일 세마포로 만들어졌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킨다(계시록 19장 8절에서 말한 의(義)는 성도가 성령으로 인하여 갖게 되는 의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는 구약이므로 성도의 의를 가리킬 수 없다). 이 휘장은 당연히 성전 안에 있는 것이다. ‘솔로몬의 장막과 같다’는 것은 내적 아름다움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는 말이다.

“해가 나를 쬐어 내가 검으니 나를 쳐다보지 말라 나의 어머니 형제가 나에게 화내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아 내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네”(다비 역). 원문에서 ‘해’는 정관사를 가지고 있다. ‘쬐어 검다’에서 ‘검다’라는 글자가 원문에는 없다. 그녀는 하나님이 침궁에서 빛 비추셨기 때문에 이미 자기가 검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이 그녀의 그때의 심경(心境)이다. 성령이 사람을 깊이 처리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여전히 다른 사람 앞에서 가리기를 좋아한다. 성령에 의해 더 깊은 부분까지 처리를 받은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는 사람 앞에서 어떤 것도 덮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때에야 그녀가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 같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기꺼이 “그 해가 나를 쪼이므로 나는 검습니다.”라고 시인한다.

“나의 어미의 형제가 나에게 화내어”. 여기서 ‘아비’라고 말하지 않고 ‘어미’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의 ‘어미’가 약속의 원칙 곧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28절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삭처럼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되었다. ‘나의 어미의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을 말한다. ‘형제’는 객관적인 방면을 대표한다. 이러한 어미의 형제들은 교리적인 방면에서 아주 역량 있고, 객관적인 방면에서 아주 강하며 또한 비교적 권위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침궁의 가르침이 있으며 일에 변화도 있기 때문에, 어미의 형제들이 그녀를 경시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화를 내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아 내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네”. 앞에 말한 포도원은 복수로서 사람의 손으로 조직한 것이다. 뒤에 말한 포도원은 단수로서 하나님 자신 이 정하신 것이다. ‘그들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네’는 이전의 일이다. 그녀는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고 하나님의 처리하심을 받은 후에 이전 일의 공허함, 즉 사람이 그녀에게 위임한 것을 했을 뿐 하나님이 그녀에게 하도록 정하신 것은 하지 않았음을 보았다.

7절에서, ‘사랑’은 동사이다. ‘양을 치다’는 ‘양을 먹이다’로 하는 것이 더 낫다. ‘얼굴을 가리움’은 ‘장소를 잃고 유리하는’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녀는 침궁에서 이미 외적인 일이 공허한 것임을 보았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양식과 안식임을 보았다. 왜냐하면 먹이는 것은 양식을 중시하는 것이고 누워 쉬는 것은 안식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늘 이후로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양식과 안식이다. 이 ‘안식’은 완전한 안식이다. 왜냐하면 정오는 완전한 때―“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이기 때문이다. 정오에 이른 것은 완전한 위치에 이른 것이다. 태양이 정오에 이르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정오에서 오후 세 시까지 이르렀다. 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시작부터 한 번에 그렇게 많은 것이었지 조금씩 증가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네(당신)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이 ‘동무’는 주님의 동무이다. 그러나 양은 주님의 양 떼가 아니고 주님의 동무의 양 떼이다. ‘얼굴을 가리다’는 ‘창피를 당하다’이다. 그녀는 아직 양무리 밖에 있다. 그녀는 부득불 주님께, “당신은 왜 나에게 어디에서 양식을 찾아 얻으며 어디에서 안식을 찾아 얻는지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나는 줄곧 양식과 안식을 추구했으나 동쪽에서도 찾지 못했고 서쪽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동무의 양 떼 곁에서 장소를 잃고 유리하는 사람처럼 그들의 비웃음과 비평을 받았습니다. 주여! 당신은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웟치만 니 전집 제 2집 23권, 제 1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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