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요 새 창조뿐임
갈라디아서
2014-08-11 , 조회 (163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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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세상은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며, 중요한 것은 새 창조물 뿐입니다. (갈 6:14-15) 
 
But far be it from me to boast except in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the world has been crucified to me and I to the world. For neither is circumcision anything nor uncircumcision, but a new creation is what  matters.(Gal. 6:14-15)
 

할례는 율법의 규례이지만 새 창조는 거룩한 본성을 가진 생명의 걸작이다. 전자는 죽은 의문에 속하고 후자는 산 그 영에 속한다. 그러므로 새 창조가 가치있는 것이다. 이 서신은 율법과 할례 양자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율법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생명을 분배해 줄 수 없고(3:21), 할례는 우리로 새 창조를 살도록 활력화 시킬 수 없다(5:6).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1:16)은 우리를 활력화시키고, 우리 안에 사는 그리스도는(2:20) 새 창조를 살 수 있도록 그의 생명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로 대치되었고(2:19-20), 할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성취되었다(6:14). 그러므로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새 창조뿐이다. 

6장 15절에서 말한 새 창조는 옛 창조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신 신성한 생명에 의해 변화된 것이다. 하나님은 옛 창조의 일부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옛 창조는 낡았지만, 새 창조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새롭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거듭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새 창조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 영으로 살고 행할 때에만 실제이다. 우리는 육체로 살고 행할 때 새 창조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옛 창조 안에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은 다 옛 창조이지만 하나님이 있는 것은 새 창조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새 창조가 되는 것이다. 이 새 창조는 아들들로 구성된다.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단체적인 아들의 명분이 곧 하나님의 새 창조이다. 옛 창조 안에 있는 사람은 타락한 아담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과 거듭남과 하나님 자신을 우리 속에 분배함으로 말미암아, 전에 아담의 아들이었던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바로 이 거룩한 아들의 명분 안에서 우리는 새 창조이다. 우리가 새 창조 안에 있다면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연합이 없을 때 우리는 옛 창조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으로 말미암아 새 창조 안에 있다. 여기 새 창조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아무 쓸모 없다. 표면적으로는 바울이 율법을 다루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쓴 것 같지만 사실 이 서신은 옛 창조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만 요점은 의롭게 하심이 아니라 새 창조에 있다. 육체 안에 있었을 때 우리는 완전히 율법에 속해 있었고 옛 창조 안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영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새 창조 안에 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의 관심은 율법과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한 교리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새 창조라는 계시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할례나 종교적인 실행과는 관련이 없다. 새 창조 안에서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즉 생명 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그분 사이의 유기적인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유기적인 연합 안에서 새 창조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갈라디아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그들은 이 서신에서 율법이 제쳐져 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강조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바울의 부담은 단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있을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신성한 생명, 즉 우리 체험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삼일 하나님으로 인한 아들의 명분을 계시하는 것이다. 단체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새 창조이다.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는 할례나 무할례, 혹은 종교나 비종교가 아니다. 중요한 주제는 우리가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으로 말미암은 새 창조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우리가 새 창조를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를 체험해야 한다. 6장 14절과 15절에 따르면 십자가는 종교적인 세상을 다룬다.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6장 14절에 있는 세상을 세속적인 세상으로만 여기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이미 지적한대로, 이 구절에 있는 세상은 주로 종교적인 세상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전체의 기본 관념에 맞는다. 이 서신은 세속적인 세상을 다루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종교, 즉 유대교를 다루기 위해 쓰여졌다. 이 책에서 바울은 종교적인 사람들, 즉 하나님의 일을 관심하지만 그릇된 방법으로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다룬다. 그들에게는 종교가 세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세속적인 세상과 종교적인 세상이 있다.

오늘날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인 세상보다 종교적인 세상에 훨씬 더 사로잡혀 있다. 크리스마스를 예로 들어보자. 크리스마스 행사는 확실히 종교적인 세상에 관련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지킨다면 당신이 새 창조를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크리스마스 행사는 하나님의 새 창조와 아무 상관없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종교적인 세상에서 분별되었다. 우리가 여전히 종교적인 세상에 속해 있다면 새 창조를 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세상이 우리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우리는 종교적인 세상에 대해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종교적인 세상으로 돌아가려 할지라도 종교적인 세상에 대해 못 박혔기 때문에

종교적인 세상이 우리를 거절할 것이라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을지라도 종교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이 다른 세상에 있으므로 그들에게서 떠나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유대교는 바울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바울과 종교적인 세상 사이에는 십자가의 분별이 있었다. 우리가 새 창조를 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분별로 말미암는다. 종교적인 세상에서 실행되는 모든 것은 옛 창조의 부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종교에 대해 끝났고 다른 영역 안에 있다. 이 영역 안에서 우린 육체로 인한 옛 창조가 아닌, 그 영으로 인한 새 창조를 산다. (갈 LS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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