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15) 뭍과 물이 분리되는 것은 생명과 죽음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상징한다.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이 풍성하게 표현 되는 것을 보여주는..
창세기(1)
2014-08-15 , 조회 (14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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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10-11 하나님께서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땅은 풀과 씨 맺는 푸성귀와 씨 있는 열매 맺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내라.” 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뭍과 물이 분리되는 것은 생명과 죽음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둘째 날부터(창1:6-7) 땅을 덮고 있던 죽음의 물의 한계를 정하시고 제한하시기 위하여 일하셨다(비교 렘 5:22). 결국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계21:1 및 각주3). 더욱이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25 및 각주1). 이것은 죽음과 어둠이 모두 없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창1:10 각주1)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이 풍성하게 표현 되는 것을 보여주는 예표이다. 왜냐하면 식물은 사람이 보기에 아름답고(창 2:9), 냄새가 향기로우며(아 1:12-13), 사람과 동물의 먹을거리가 되기(창 1:29-30) 때문이다. 나무(창 2:9, 출15:23-25, 아2:3 …)와 꽃(아 1:14), 그리고 사람의 양식(요 6:9, 13)이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레2:1-3, 14)인 곡식은 모두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창1:11 각주1)

 

마른 땅이 드러난 것은 생명을 산출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날,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나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나와 부활하신 것은 오직 생명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렐루야!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빛과 어둠을 분별하며,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을 구별하며, 신성한 생명과 죽음을 분별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내가 말할 때 거기에 어둠과 땅에 속한 것이 없다할지라도 생명이 없이 말할 수 있다. 내말이 진실하고 합당하며 어둠이 없고 세상적인 것이 없어도, 생명이 없어 죽음으로 가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님, 제 속에 있는 모든 죽음의 물을 몰아내소서. 그리고 생명을 산출하는 마른 땅을 드러내소서.” 내 말속에는 어둠과 세상과 죽음이 없어야한다. 내말 속에는 생명을 산출하는 마른땅이 있어야한다.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어둠이나 세상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명도 없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 집에 왔을 때 어둠이나 세상적인 것은 전혀 볼 수 없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도 전혀 볼 수 없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음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집에 갔을 때 모든 것이 생명으로 충만한 것을 볼 수 있기 바란다. 마른 땅이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의 가정에 생명을 산출하실 것이다.

 

땅위에 식물의 생명이 나왔다. 가장 낮은 생명, 곧 의식(意識)이 없는 생명이 생긴 것이다. …만일 우리가 풀이나 나무에게 말을 해본다면 풀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나무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풀과 나무는 느낌이 없고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는 감정도, 생각도, 의지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의식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낮은 생명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있는 죽음의 물에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생명, 곧 생명의 산출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우리 속에는 생명이 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는 생명을 받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그 생명은 매우 낮은 단계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에 나타난 풀과 씨 맺는 푸성귀와 열매 맺는 과일 나무가 상징하는 것이다. 식물의 생명에는 세 가지 순서가 있다. 풀은 식물의 생명 중 가장 낮은 것이다. 씨 맺는 푸성귀는 그보다 높은 생명이며 열매 맺는 과일나무는 가장 높은 생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생명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그 생명은 매우 낮은 단계의 생명이었다. 아마 우리 속의 그 생명은 풀 같은 생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생명이며 또 자라날 것이지만, 그것은 가장 낮은 단계의 생명이었다. …지난주에 여러분은 풀과 같았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좀 더 자라서 씨 맺는 푸성귀일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두 달쯤 후에 여러분이 열매 맺는 과일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될 때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그것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이 아니다. 이것은 셋째 날에 일어난 일 일 뿐이다. (창세기 라이프스타디, 3장, 54-55쪽, 4장, 57-58쪽)

추가로 읽을 말씀: 창세기 라이프스타디, 4장

출처: 한국복음서원<아침부흥 거룩한 말씀>

http://www.kgbr.co.kr/mediazone_mann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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