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백 개의 석류들 중 구십 여섯 개가 대기에 드러나 있음
창세기
2014-08-29 , 조회 (138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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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구십 육이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일백이었더라 (렘 52:23)

And there were ninety-six pomegranates toward the open air; all the pomegranates on the network were a hundred all around.(Jer.52:23)

일백 개의 석류들 중 구십 여섯 개는 대기에 드러나 있었다(렘 52:23). 매줄에 일백 개의 석류가 있었는데 왜 예레미야 52장 23절에서는 갑자기 구십 여섯 개의 석류들에 대하여 말하는가? 예레미야 52장 23절은 바벨론 군대들에 의한 기둥들의 파괴와 관계가 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사슬 무늬 세공의 각 줄에 있는 네 석류들이 부서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장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이것이 그러한 경우가 아니었음을 볼 것이다. 흠정역에서는, 『한 면에 있는 석류는 구십 육이요』라고 말한다. 이 번역은 부정확하다. 「한 면에(on a side)」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대기를 향하여(toward the air)」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대기를 향한 석류가 구십 육이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무늬의 세공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일백이었더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물 무늬 세공 위에 있는 모든 석류의 수가 일백이었음을 주의하라. 모두가 그곳에 있었지만 구십 여섯 개만이 하늘(공기)을 향하고 있었다. 흠정역에서 「면(side)」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루아흐(ruach)이며 이것은 영, 바람, 호흡, 공기를 뜻하는 단어이다. 루아흐는 실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새 미국 표준역(NASV)은 「드러난 석류들」이 구십 여섯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백에서, 바람부는 쪽으로, 혹은 대기를 향하여라는 의미의 「바람 맞이로(windward)」라는 축어적인 번역을 제시하고 있다. 구십 여섯 석류는 드러나 있었고 네 석류는 가리워져 있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십 육(96)은 십 이(12)와 팔(8)을 곱하여 구성된다. 십 이(12)는 영원한 완전을 상징하고 팔(8)은

부활을 상징하며 대기는 영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부요함의 표현은 부활 안에서, 영 안에서 영원히 완전하다. 이것이 생명에 관한 우리의 표현의 본성과 분위기이다. 생명의 부요함에 관한 우리의 표현은 십 이(12)이고 영원하다. 그것은 칠(7)이 아니며 일시적이지 않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부활의 신선함을 말하는 수 팔(8)이지 부활의 과정을 말하는 수 삼(3)이 아니다. 여기서 그것은 부활의 과정이 아니라 부활의 신선함과 부활의 시작과 부활의 새로운 출발이다. 또한 그것은 분명히 영 안에서의 문제이다. 구십 여섯 개의 석류가 대기에 드러나 있었던 것은 생명의 부요함의 표현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공기의 실제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주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람과 영을 말씀하셨다. 영의 거듭남과 바람의 움직임은 비슷하다. 바람은 불고 영은 거듭난다. 생명의 부요함에 관한 표현은 영원하고 부활의 신선함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분명 영의 분위기 안에 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생명의 부요함의 표현을 볼 때마다 그들은 즉시 그들이 영 안에 있다는 것과 그곳에 어떤 신선한 바람과 공기와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망으로 가득 찬 상황 안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의 부요함의 표현으로 충만한 상황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적인 분위기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신선하게 하는 공기가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구십 여섯 개의 석류가 대기를 향한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각 일백 석류 중에 넷이 가리워져 있었다. 성경에는 쓸데 없는 말이 전혀 없으므로 이 구절에는 우리의 체험과 연관된 어떤 의미가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체험을 통해서이다. 매 일백 석류들 가운데 넷이 가리워져 있었다는 것은 생명의 부요함에 관한 우리의 체험이 부활 안에서, 영 안에서 영원한 반면, 사(4)로 상징되는 우리의 천연적인 존재는 덮여져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과 천연적인 존재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아는 완전히 가리워져야 한다. 나는 이 석류들이 어떻게 가리워져 있었는지를 발견하려고

애썼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 알고 계시는 비밀이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이 표현될 때 다른 사람들은 부활 안에서, 영의 분위기 안에서 생명의 부요함의 영원한 표현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자아가 덮여짐을 아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내(I)」가 나타날 때마다 큰 수 사(4)는 그곳에 있지만 구십 육(96)은 사라질 것이다. 공기 대신 천연적인 생명과 옛 사람과 자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4)라는 수가 사라질 때마다 우리는 대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한 표현인 구십 여섯 개의 석류들을 체험할 것이다. ( 창 LS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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