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아들은 생명의 근본이신 아버지의 표현이다
골로새서
2014-09-19 , 조회 (139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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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보았으며, 이제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전해 줍니다.)(요일 1:2)

(And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and testify and report to you the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to us); (1 John. 1:2)

우리는 흑암의 권세로부터 구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안으로 옮겨졌다. 아들의 나라는 곧 그리스도의 권세이다(계 11:15, 12:10). 아버지의 아들은 생명의 근본이신 아버지의 표현이다(요 1:18, 4, 요일 1:2). 생명의 근본이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표현된다. 아버지의 사랑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분은 신성한 사랑 안에서 부활의 권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난 생명의 체현이다. 신성한 생명의 체현인 아들이, 곧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다. 아들 안에 체현된 신성한 생명은 신성한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랑의 대상은 신성한 사랑 안에서 부활의 권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의 체현이 되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이다.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정의(定義)를 내리기 보다 하나의 예화(例話)를 들어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당신의 체험을 보라. 주 예수님이 참으로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분임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주 예수를 사랑하면서 우리는 어떤 달콤한 사랑의 느낌을 갖게 된다. 이 느낌은 주 예수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對象)임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통제나 다스림 아래 들어간다. 주 예수를 사랑하기 전에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자유롭게 행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더 많이 말하게 될수록 우리의 자유는 더 없어진다.

전에 우리는 안에서 제한되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세상 오락에 끼어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그분의 다스림 아래 들어 오게 되었다. 이 다스림은 거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달콤하고도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달콤한 제한과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즐거운 다스림으로 인해 우리는 헛된 말 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분을 슬프게 하는 생각조차도 좋아하지 않게 된다. 사랑의 달콤함 속에서 우리는 최대한의 다스림과 제한을 받는다. 이것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므로 주 예수께 더 기꺼이 제한을 받고 다스림을 받으려고 할수록, 우리의 생명은 더욱더 자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쁜 것뿐 아니라 철학과 의식(儀式)과 관례(慣例)와 금욕주의로부터, 즉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다. 철학과 윤리와 금욕주의와 의식(儀式)에 집착했을 때 우리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 권세로부터 건져내시어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다. 여기에는 관례도, 종교적인 의식(儀式)도, 행위도, 철학도, 신비주의도, 그노시스교도, 금욕주의도 없다. 우리에게는 그분의 사랑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과 빛과 생명을 소유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이외의 것으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이 아직도 자아(自我)로 말미암은 통제, 즉 자아에 의해 이루어진 통제 아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통제도 흑암의 권세이다. 이러한 통제 아래 있으면 성경을 읽어도 아무 빛도 받지 못하고, 기도 중에도 아무 말씀도 들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 즉 우리의 옛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취향(趣向)과 행동으로부터 건져내주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옛사람의 어떤 면(面)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흑암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게 한다. 사실 우리들은 흑암의 권세와 통제 아래 머물면서 실제적으로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의 분깃이신 그리스도를 거의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골 L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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