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류의 느낌
생명의 체험
2014-09-22 , 조회 (1181)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한 양심에서 떠났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어졌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갑시다.(히 10:22)

Let us come forward to the Holy of Holies  with a true heart in full assurance of faith, having our hearts sprinkled from an evil conscience and having our bodies washed with pure water.(Heb.10:22)

수 세대에 걸쳐서 생명을 추구해 온 모든 성도들은 눈이 우리 몸의 창문이듯이 양심이 우리 영의 창문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창문 자체는 빛이 없고, 모든 빛이 다른 근원에서 전달되어 온다. 양심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양심 자체에는 느낌이 전혀 없다고 감히 말하지는 않지만, 그 느낌의 대부분이 인접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접 부분을 총합해 보면 일곱 가지가 된다. 생각, 감정, 의지, 직감, 교통,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영 등 이러한 일곱 가지 인접 부분들은 모두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이 양심에 침투될 때 양심의 느낌이 된다. 이것이 양심의 느낌의 기원이다. 성도들의 양심의 느낌은 여러 방면이 있다. 예민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범사에 양심의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양심의 느낌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죄에 대한 느낌이다. 죄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장(章)에서 우리는 죄를 처리하는 근거가 내적인 의식이라고 했었다. 이 속의 의식이 양심의 느낌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죄를 범한다면 양심은 즉시 정죄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범주의 양심의 느낌이다.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한 느낌이다. 세상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장에서 우리는 세상을 처리하는 근거 역시 내적인 의식이라고 했다. 이러한 내적인 의식도 여전히 양심의 느낌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것들을 좋아하거나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면, 양심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정죄하는 느낌을 줄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범주의 양심의 느낌이다. 

양심의 느낌에 대한 이 두 범주 이외에도 세 번째 범주가 있는데, 죄와 세상과 상관없는 것인데도 불안한 느낌이다. 죄도 아니고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데도 우리 양심으로 평강의 느낌을 잃어버리게 하는 문제들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전혀 통과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 일상생활에서 느슨함과 부정확함은 죄도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 양심은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불안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의복이나 물건들을 주위에 흐트러뜨려 놓고서 무질서한 상태로 그 방을 나선다면 그의 양심이 그를 책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 성격에 어떤 결함과 괴상함이 있거나 타인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적합하지 못하고, 혹은 하나님 앞에서 바람직하지 않거나 적합하지 못한 태도를 지닌다면,

비록 그러한 것들이 죄나 세상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양심은 상하게 된다. 이 모든 불안한 느낌은 세 번째 범주의 양심의 느낌이다. 양심의 느낌에 대한 세 가지 범주 중에서, 죄와 세상에 관한 처음 두 가지는 표면적인데 비해 세 번째 것은 더 깊은 것이다. 양심을 처리하는 초기 단계에서 우리 속의 느낌은 죄와 세상에 대하여 다소 민감하다. 이러한 느낌을 모두 처리하고 나서야 세 번째 범주의 느낌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양심을 더 엄격하고 철저하게 처리할수록 이 세 번째 범주의 느낌은 더 증가된다. 양심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강조점은 이 세 번째 범주의 느낌을 처리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이러한 세 범주의 느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양심은 불신자의 양심보다 더 선명하고 더 예민하다.

불신자는 세상에 대하여 느낌이 없으며 세 번째 범주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 사람은 단지 죄에 대한 느낌인 선악 시비의 느낌만 지니고 있을 뿐이며, 이 느낌조차도 아주 둔하다. 불신자의 양심의 느낌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느끼는 것의 삼분의 일 정도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느낌이 더 선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드럽고 새롭게 된 새 마음이요, 그의 영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되고 새롭게 된 새 영이며,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상당히 새롭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느낌은 실로 선명하다. (생명의 체험, 제 6장) 

히브리서 10장 22절,느슨함 부정확함,무질서, 진실한,창문 느낌, 확신에 평강,표면적 예민,부드럽고 새롭게,민감 소생,선명

트랙백:  수신불가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