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곱 영
빌립보서
2014-10-05 , 조회 (161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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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보니, 보좌와 네 생물 한가운데에, 그리고  장로들 한가운데에 갓 죽음을 당하신 것 같은 한 어린양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셨는데, 이것은 온 땅에 보내어지신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 5:6)

And I saw  in the midst  of  the  throne and of the four living creatures  and in the midst of the elders a  Lamb standing as having just been slain, having seven horns and seven eyes, which are the seven Spirits of God sent  forth into all the earth.(Rev 5:6)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언급하고 있다(계 1:4, 4:5, 5:6). 이러한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의 불타는 일곱 등불이요 또한 어린 양의 일곱 눈이다. 계시록에서는 일곱 영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 그 영이 하나인지 일곱인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의 지식적인 수학에 따르면 하나는 하나이고 일곱은 일곱이다. 그러나 성경의 수학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일곱이 하나요 하나가 일곱이다. 그 한 영이 일곱 영이라 불리웠다.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가지 다른 인격들로 간주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된 인격들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셋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나는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계시록 5장 6절을 어떻게 말할지 의문이다.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세 번째 인격인 일곱 영이 두 번째

인격인 어린 양의 일곱 눈임을 말하고 있다. 만일 아들과 그 영이 두 개의 분리된 인격이라면 어떻게 일곱 영이 어린 양의 일곱 눈이 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해서 삼일성의 한 인격인 그 영이 아들인 다른 인격의 일곱 눈이 될 수 있는가? 그 영, 복합된 영, 일곱 영에 대한 삼일성의 이해는 전통적인 이해로나 특히 니케아 신조의 규정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사실상 전통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는 매우 좁고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온전히 순수한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넓고 모든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셋을 말할 때 인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말을 너무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는 이러한 위험을 인식했다. 「신학의 원칙(The Principles of Theology)」에서 그는 삼일성에 관해 이것을 말했다. 『인격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반대를 당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이 말은 자칫하면 부적당할 수 있고 적극적인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확실히 인격이란 말을 너무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 인격이라는 말을 너무 강조하는 사람들은 결국 신격의 세 인격에 그치지 않고 세 하나님을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삼일성 대신 삼신론을 갖게 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많은 기독교 교사들이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삼일성을 적합하게 정의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사람에 대해서조차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삼일 하나님의 비밀을 합당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니케아 신조의 불충분함이나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영이

다만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영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지어 예수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으로만 제한되지 않음을 본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이 영은 삼일 하나님의 만유를 포함한, 복합적인 생명 주는 영이요 「그 영」이다. 이 영은 너무나 부요하고 풍성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급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모든 것을 포함한 영의 넘치는 공급을 누리고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하고 책을 쓰기도 하지만 복합적인 영이나 일곱 영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니케아 신조에 표현된 하나님의 영에 대한 제한되고 전통적인 이해를 붙잡고 있다. 카리스마 운동이나 오순절 운동에 있는 사람들은 그 영의 체험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 또한 생명 주는 복합적인 일곱 영을 무시하는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성령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갖는다면, 그 영은 오늘 다른 것이 아니라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과정을 거친」이라는 말을 반대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과정을 거칠 수 없다고 따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하지 않았는가? 만일 이것이 과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묘사할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성경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하기 위해 삼일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부활을 통과하기까지 삼일 하나님이 거치신 단계를 나타내기 위해 과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영을 체험하고 복합적인 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일곱 영을 체험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 복합적인,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을 더욱더 누려야 한다. 그와 같은 영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고난을 받았으며, 동시에 부활 안에서 그에게 힘을 주는 넘치는 공급을 누렸다. 바울은 강한 의지(意志)를 가졌기 때문에 이기는 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 그의 안에 거주하시는 만유를 포함한 영을 넘치는 공급으로 누리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다. 바울은 그의 체험 안에서 삼일 하나님이 그의 존재 안으로 그분 자신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역시 우리를 공급하시며 그분 자신을 복합적인,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며 누리기를 원한다. (빌립보서 L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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