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어려움을 돌파하시는 방법
교회의 발자취
2014-11-02 , 조회 (112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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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관한 일들을 엄숙히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행 23:11)

But in the night following, the Lord stood by him and said, Take courage, for as you have solemnly testified to the things concerning Me in Jerusalem, so also you must testify in Rome.(Acts. 23:11)

바울이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성령의 통제가 있었다. 바울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칠일이 다 찰 무렵에 유대인들이 그를 붙잡았다(행 21:26-27).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로마의 황태자 티투스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성전을 훼파하였으며, 이후로 지금까지 성전은 훼파된 상태로 남아 있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교회는 유대교로 돌아갔을 것이고 유대교와 연합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신약에서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고 교회가 유대교와 섞이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교를 완전히 허물어뜨리셨다.돌이켜 유대인들을 생각한 사도 바울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둬 두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유대교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무너뜨려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교회는 조금도 남김없이 완전히 훼파되었다. 이때부터 성경에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지위가 없게 되었고 교회사에서도 더 이상 그 지위가 없게 되었으며 이 상황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하나님께는 예루살렘이 은혜를 파괴하고 빛을 막는 지방이었으므로 하나님은 그 성과 성전을 헐어버리셨고 동시에 이러한 어려움과 방해들을 돌파하셨다. 우리는 다시 성령의 뜻을 보기로 하자. 바울의 연약함이 드러난 후 그가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그는 오직 그의 지혜만을 사용하였다. 첫째, 그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앞에서 부활을 언급하였다(행 23:6-8). 

바울은 회중의 절반이 사두개인이고 절반이 바리새인인 것을 보고는 회중들에게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6절)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정통 유대인들은 즉시 바울의 편에 서서 사두개인들과 맞섰는데 이것은 바울의 지혜였다. 둘째는 카이사르에게 상소한 것이다(25:11). 바울 안에는 원래 로마로 가야 된다는 느낌이 여전히 있었다. 그가 로마로 가려고 할 때 성령은 그가 반드시 로마에서 주님을 위해 증언해야 된다고 그에게 계시하셨다(23:11). 그가 마지막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을 때에는 이전보다 출입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이전에 로마에 갈 때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갔지만 이번에는 불편한 상태로 갔고, 이전에 로마에 가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달랐다.

이때부터 바울의 행적은 매우 큰 제한을 받게 되었다. 또 다른 면에서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매우 좋은 공과를 배우게 되었고 매우 좋은 처리를 받았다. 그는 매우 깊은 공과를 배웠으며 아울러 로마 감옥에서 보배로운 많은 서신들을 썼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 당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교회의 확장에 장애물을 가져다주었음을 보아야 한다. 곧은 길을 가지 못하고 구부러진 길을 가게 되는 이유는 다 우리 몸에 있는 어려움과 방해 때문이다. 그 당시 바울은 반드시 고린도에서부터 계속 전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여전히 옛 창조의 성분이 남아 있었고 낡은 규례가 남아 있었으며 또한 이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은 그의 몸에 장애가 되었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사도행전 15장과 21장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간에 쓰인 책이 갈라디아서이다. 그는 일찍이 갈라디아서에서 유대교의 율법을 조금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가 일찍이 어떤 사람 가운데서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었지만(고전 9:20-22) 그가 이번에 유대인이 된 것은 너무나 지나친 것이었다. 사실상 우리는 어떤 부류의 사람 가운데에서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은 만약 어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면 우리도 우상을 숭배해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나 지나친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와 같이 행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가 얻은 계시 안에서 이방의 교회들을 가르칠 때, 율법은 모두 지나갔기 때문에 다시는 유대교의 것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하였다. 만약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유대인이 되고자 하였다면 유대인과 비슷하게만 행하고, 서원하거나 제물을 드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 그는 그가 얻은 계시를 거슬렀고 그가 교회에게 준 가르침을 크게 거슬렀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너무나 지나친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친구와 함께 산책하다가 영화관 입구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당신의 친구가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고 하자. 

이때 당신은 그에게 나는 들어갈 수 없으니 당신만 들어가라고 정중히 말해야 된다.우리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노름을 하러 갈 때 우리는 그와 함께 거기에 앉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연약했던 원인은 그가 성령 안에 있지 못했고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강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에서 행하고 성령의 임재를 가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어떤 사람도 연약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발자취, 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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