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까지 신실함
요한계시록
2014-11-19 , 조회 (121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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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거하는 곳을 안다. 그곳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다. 너는 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심지어 나의 신실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음을 당하던 때에도, 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계 2:13)

I know where you dwell, where Satan's throne is; and you hold fast My name and have not denied My faith, even in the days of Antipas, My witness, My faithful one, who was killed among you, where Satan dwells.(Rev.2:13)

안디바는 그의 반대 간증에 있어서 신실했으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러했다. 교회가 세상적인 것에 반대하는 그의 간증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세상적인 교회에 반대하여 간증하기 위해서는 순교의 영이 필요하다. 우리는 죽기까지 교회가 세상적인 것을 반대함으로써 주의 간증에 신실해야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안디바는 반대 증인이요 반대 간증이었다. 오늘날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도 역시 반대 간증이다. 개신교의 기독교가 1830년 중국으로 전파된 이래로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소 세상적이었다. 1922년을 시작으로 주님은 지방 교회들의 간증을 일으키셨다. 이 간증은 주의 회복을 위한 탁월한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복을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 의해 긍정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 결과 그들은 많은 면에서 바뀌었다. 그들은 주의 회복의 길을 가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력을 통절히 느꼈고 우리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것을 취했다. 만일 당신이 1922년과 1936년 사이에 중국에 있었던 선교사들에게 확인해 본다면, 그들은 주의 회복이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 줄 것이다. 

나는 기독교 안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교통(fellow-ship)이란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의 회복으로 인해 거의 모든 교파들이 이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들이 게시판에 「예배 시간」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나 우리의 영향으로 그들은 그 단어를 「집회 시간」이라고 변경했다. 「예배 시간」과 「집회 시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주의 회복의 영향하에서 지난 40여 년 동안 극동에 있는 기독교는 더욱 근본주의적으로 되었고 성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심지어 우리 책들을 그들의 가르침과 설교의 자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서 배웠다고 용감히 시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가르침들은 취하면서도 주의 회복의 길을 반대하고 우리의 간증을 비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무엇인가를 얻으셨다. 내가 듣기로는 대북에서 외부인들이 언제나 우리의 서점에서 많은 수의 책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어떤 선교사가 대만에 관해 보고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그 섬에 대한 우리의 일에 관해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관유(灌油)안에 있는 죽은 파리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죽은 파리」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그것은 교회 입장(立場)이었다. 그의 관념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교회 입장을 내려놓는다면 우리의 관유가 정결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교회 입장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 생명을 내려놓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3년 전 대북을 방문하는 중에 나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난 적이 있다. 한 설교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기들은 왜 그렇게 많은 새로운 빛이 교회들 안에 항상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빛은 거리에나 바깥 마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곳, 즉 교회 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늘 주님에게서 신선한 것을 받는 이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있다. 13년 전 나는 사람의 영과 교회의 실행과 연합(mingling)에 관해 로스앤젤리스의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말하기를, 『형제들이여, 어느 일정 기간만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면 외부인들이 이런 용어들을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어김없이 일어났었다. 우리가 전하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서 취해진 바 되었다. 한면으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고 다른 한면으로 그들은 우리의 자료들을 은밀하게 사용한다. 나는 공개적으로는 우리를 반대하지만 사람들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으로 가르치는 어떤 설교자를 알고 있다. 텍사스의 타일러(Tyler)를 방문하는 동안 나는 변화에 관한 일련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참석자들 중 한 명은 남미에서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모든 메시지를 필기했다. 특별집회 끝 무렵에 그는 우리의 「흐름(Stream)」 지(誌)에서 몇 가지 기사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것을 허락해 주었다. 몇 달 후 타일러에 돌아왔는데 어떤 형제가 인사를 하면서 『여기에 위트니스 리께서 쓴 책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 책을 보았을 때 나는 위트니스 리라는 이름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우리 특별 집회에 참석해서 모든 메시지를 필기했던 그 설교자의 이름만 보았다. 그는 다른 곳에 가서 그 메시지들을 전했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책으로 출판했다. 도대체 우리는 이것에 관해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움을 받는 한 우리는 그것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런 도움을 위해 서 있지 않다. 우리는 예수의 간증을 위해 서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안디바가 되어야 한다.(계 L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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