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 (1)
교회의 의의
2014-11-29 , 조회 (1021)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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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이삭이 묵상을 하려고 들에 나갔다가 눈을 들어 보니, 낙타들이 오고 있었다.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보고서 즉시 낙타에서 내려 그 종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맞으러 들에서 걸어오는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종이 대답하였다.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서 자기의 얼굴을 가렸다.(창 24:63-65)

And Isaac went out  to meditate in the field toward evening. And he lifted up his eyes and looked, and behold, camels were coming. And Rebekah lifted up her eyes; and when she saw Isaac, she sprang off the camel. And she said to the servant, Who is this man who is walking in the field to meet us? And the servant said, It  is my master. And she took her veil and covered herself. (Gen.24:63-65)

교회의 예표로서 하와는 교회의 산출과 본성에 관련된다. 리브가는 교회가 세상에서 선택되어 나온 것을 예표하며 교회의 노정에 초점을 둔다. 리브가가 선택되어 나온 후에 늙은 종은 그녀를 약대에 태워 가나안 땅으로 데려갔다(창 24:61-64).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선택하시고 분별하신 것이기 때문에 부름받은 이후에 교회는 반드시 가야 할 노정이 있다. 이 노정은 또한 교회의 발자취를 예표한다. 

부름받은 사람은 반드시 긴 노정을 가야 한다. 부름받은 사람은 멈추거나 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를 매일매일 계산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우리가 노정을 다 마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모른다. 교회가 가야 할 노정을 다 걸었을 때,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리브가는 밧단아람에 앉아서 이삭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그녀는 밧단아람에서 먼 길을 걸었고, 다음날 저녁 무렵에 이삭이 마중 나왔다. 여기에 큰 발걸음과 작은 발걸음이 있다. 큰 발걸음은 교회의 발걸음을 말하고, 작은 발걸음은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의미한다. 교회가 걸어야 할 노정을 가야만 그리스도께서 마중 나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이는 항상 교회가 어떻게 들림 받는지, 농작물이 어떻게 수확되는지를 강론한다. 그러나 농작물이 성숙할 때에만 비로소 주인이 추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들림 받는 것을 다만 예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하나의 노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들림 받는 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들림 받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교회가 가야 할 길을 다 갔을 때가 비로소 들림 받을 때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교회를 맞이하실 것이다. 노정으로 말하면, 리브가는 먼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삭은 짧은 길을 걸었고 두 사람은 만났다. 방향으로 말하면, 리브가는 내리막길이 아니라 오르막길을 걸었다. 더욱이 이것은 멀고 높은 오르막길이었다. 이삭은 그리 멀지 않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두 사람은 만났다. 시간으로 말하면, 리브가는 몇 달을 걸어야 했고, 이삭은 저녁 무렵 해가 질 때 짧은 노정을 걸었다. 교회의 노정을 다 마칠 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걸어 나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들림 받는 것을 연구하거나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노정을 가야 한다. 

그날 저녁 무렵, 이삭은 장막에서 나와 밭 사이로 걷고 있었다(63절). 신약에서 밭 사이는 세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로 이 시대 끝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그분께서 역대로 부르셨던 배필인 교회와 만나실 것을 예표한다. 그러나 이삭이 리브가를 취한 것은 밭 사이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장막 안에서였다(67절).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계시는 이 장막은 새 예루살렘을 예표한다(계 21:3). 그때 그분께서 역대로 부르셨던 교회와 그분은 완전히 연합할 것이다. 늙은 종은 약대에 리브가를 태우고 황폐한 광야를 건넜다. 약대는 사막의 건조한 곳을 이동하는 유용한 이동수단이다. 리브가는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 길고 황폐한 사막을 건넜다. 이것은 교회가 이 땅에서 가야 할 길을 예표한다. 

이 길은 자주 고통과 근심과 환난이 있으며, 험난하고 걷기 힘든 길이다. 레위기 11장 4절의 기록에 의하면 약대는 부정한 동물 중 하나이다. 이것은 교회가 이 땅을 지나갈 때, 다룸을 통해 전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교회를 다루는 도구로써 사람과 일과 사물들을 안배하신다는 것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땅을 지날 때에 성령은 사람과 일과 사물을 일으키시고, 교회가 전진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반드시 정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자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부정한 약대일 수 있다. 하나님의 회막 안에서 우리는 오직 소나 양을 볼 수 있을 뿐 약대는 볼 수 없다. 약대는 광야에서 볼 수 있다.(교회의 의의, 제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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