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통제 아래 있는 혼 (2)
영에 속한 사람
2014-12-04 , 조회 (101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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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마 11:29-30)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lowly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Matt. 11:29-30) 

야고보서 1장에서도 이러한 구원을 말한다. “너희 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접붙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원문 참조). 나뭇가지가 다른 나무에 접붙여질 때 그 가지는 접붙인 나무의 본질을 받아들이게 되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명 안에 접붙여질 때에 말씀의 본질은 우리에게 접붙여진다. 이럴 때 이 나무는 쓸모없게 되지 않을 뿐더러 또한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다. 나무가 잘라지는 것은 원가지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 생명과 유기적으로 연합하기 위한 것이다. 혼의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 존재하지만, 이제 혼의 기관이 사는 것은 혼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다. 이것이 참된 ‘혼의 구원’이다.

인간의 신경은 본래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툭하면 외부의 자극을 받는다. 우리의 감정은 밖의 말과 태도와 환경과 인정에 의해 가장 상처를 잘 입는다. 본래 우리의 생각은 많은 사상과 계획과 이상이 있어서 참으로 분란하다. 본래 우리의 의지는 많은 의견과 주장이 있어서 자기가 좋은 대로 행하기를 좋아한다. 우리 혼 생명의 어떤 기관도 우리에게 평강을 주지 못한다. 혼 생명의 각 부분은 단독적으로 혹은 연합하여 순간순간 우리를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바뀌게 하고 우리를 어지럽게 하며 혼동시키고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혼이 영의 다스림을 받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주께 항복하고, 그분의 멍에를 메기 원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혼은 자극을 받지 않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본받고 주님으로부터 그분이 어떻게 사람들의 천대를 받으셨으며 자기 뜻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셨는지를 보고 배운다면, 혼 안에서의 우리의 분란함은 곧 평정될 것이다. 괴로움과 근심이 임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과 안배하심에 순종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혼 생명을 죽음에 넘기고 온전히 주께 항복한다면, 우리의 혼―신경이 예민한 혼―은 주 안에 안식하게 되고 다시는 주님을 오해하지 않게 된다. 성령의 통치아래 있는 혼은 안식하는 혼이다. 과거에 분주하게 계획하던 자가 이제는 잠잠히 주를 신뢰하게 되었다. 

과거에 늘 슬퍼하고 조급해하던 자가 이제는 젖을 뗀 아이같이 어머니 품에 안식하게 되었다. 과거에 자기 뜻이 가득하고 많은 욕망과 웅지가 있었던 이가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선하게 여기고 하나님 안에 안식하게 되었다. 참으로 ‘온전히 주께 순종할 때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다’. 온전히 주께 드릴 때 모든 일에 안식이 있게 된다. 에베소서 6장 6절에도 이와 비슷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혼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원문 참조). 즉 과거와 같이 ‘혼을 힘입어’―자기를 의지하여―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혼으로부터―마음을 다해―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던 혼 생명이 이제 십자가의 운행을 거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 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었다. 

과거에 한 때 우리는 자기 뜻대로 행하거나 자기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 그러나 이제는 범사에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의 통제를 받는 혼은 자기를 위하여 염려하지 않는다. “너희 … 목숨(혼)을 위하여 … 염려하지 말라”(마 6:25). 이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며, 의복, 거처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실 것을 믿는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성령의 운행에 의해 혼 생명이 이미 처리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자아 의식이 혼의 첫째 되는 표현이었지만, 이제 믿는 이가 참되게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써 자신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 도모하며 자기를 생각하는 것들―혼의 일들―은 이미 제거되었고, 

이런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도모하지 않게 되었다. 십자가의 운행을 거친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분주하게 계획하지 않는다. 한 때는 염려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안심하며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내가 염두에 두면 하나님도 내가 생각하는 것을 염두에 두실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 때는 기적을 기이한 것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그분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의 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후견인이 되시므로 먹고 마시는 생명의 문제는 극히 작은 일이 된다. (영에 속한 사람 3부, 제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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