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처리하는 기준
생명의 체험
2014-12-26 , 조회 (321)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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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항상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훈련하고 있습니다.(행 24:16)

Because of this I also exercise myself  to always have a conscience without  offense toward God and men. (Acts. 24:16)

양심을 처리할 때, 생명과 평강을 지니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처리해야 하지만, 또한 처리에 있어서 통제하는 기준도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속에 생명과 평강이 결여되어 있다면 생명과 평강을 얻기까지 처리해야 하지만, 생명과 평강이 결여된 모든 느낌이 처리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느낌이 처리 기준에 달하는 것인지를 다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그것이 기준과 일치하면 그것을 처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 따라서 처리 기준은 우리가 처리를 실행하기 시작할 때 중요한 척도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 주님을 따르기를 결심할 때 그는 주님께서 철저히 처리하시는 것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며, 심지어는 체면을 버리고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때 사탄은 흔히 많은 거짓 느낌을 가져오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가 사람을 속였다는 것으로 지나친 처리를 요구하는 느낌을 갖게 되며, 이로써 영적 손실을 입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처리의 기준을 인식해야 하고, 생명과 평강이 결여된 모든 느낌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많은 위험과 실수를 피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처리하는 기준이 경계와 보호가 된다. 우리는 죄를 처리하는 기준이 의라고 말했었다. 의롭지 못한 문제만이 처리되어야 한다. 불의가 없다면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세상을 처리하는 기준도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서 세상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의 생존에 불필요한 모든 것이나 우리를 사로잡는 모든 것은 처리되어야 하지만, 그 이외에는 더 처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을 처리하는 기준은 그 문제가 의미가 있는지, 혹은 감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을 우리 양심에 평강이 결여된 것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이 평강의 결여가 의미가 있는가? 내가 그것을 처리할 경우 덕이 되겠는가? 다른 사람이 도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수 있겠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 적절히 처리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없다면, 그것을 무시하고 처리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나서 아무렇게나 집어던져 버리는 형제를 생각해 보자. 즉시 속에서 평강이 사라져 버리고, 그의 부주의는 양심에 의해 책망받는다. 이런 경우에 그 형제는 가서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제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 형제는 자기 속의 느낌을 따라서 그 책을 취급해야 하며 그때 속에 평강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이 평강의 결여는 그 형제에게 부주의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는 데 명백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제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평강이 없고, 마루에 앉아 있어야만 평강이 있다면, 자기 양심을 의미 없는 일에서 처리해 온 것이다.

 만일 그 형제가 성경을 손에 들고 다닐 때는 평강이 없고 어깨에다 메고 갈 때에만 평강이 있다면 이러한 평강의 결여는 무의미하다. 그 형제가 이러한 무의미한 느낌을 처리할수록, 그러한 느낌은 더 증가된다. 결국에는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근거를 주어 많은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한 면으로 우리는 속의 생명과 평강의 요구에 따라서 엄하게 우리 양심을 처리해야 한다. 또 한 면으로 우리는 처리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기준에 의하여 통제받아야 한다. 원칙에 따라서 우리가 균형을 이루고 유익한 처리를 할 때 우리의 생명이 자라고 대적이 우리를 공격할 근거를 주지 않게 된다.(생명의 체험,제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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