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교통 (2)
교회의 발자취
2015-01-24 , 조회 (1057)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교통을 갖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통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요일 1:3)
That which we have seen and heard we report also to you that you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indee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1 John. 1:3)

교회가 황폐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이러한 종류의 하나를 이루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 그들도 해낼 수 없고 우리 또한 해낼 수 없다.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을 용납하려면 왜 천주교는 용납하지 않는가? 천주교 안에도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당신이 만약 그들을 따라서 향을 피우고 우상에 입 맞춘다면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 당신은 유독 그 무리의 그리스도인만을 후대하고 그들을 용납하려고 하는가? 하나가 파괴된 오늘에 와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회복하라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 비천한 것들에서 나오라고 하셨다. 나는 여러분에게 가서 분열을 일으키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황폐할 때 우리는 안에 있는 생명의 교통을 돌아보아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생명의 교통이 안 될 때에는 결코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끌어오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섬기는 주님 앞에서 말하고 싶다. 그러한 방법은 반드시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비천한 것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나는 대만에 와서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유익이 된다면 당신은 어디에 가서 집회를 해도 됩니다.”라고 계속 말하였다. 생명의 교통이 있다면 어디에서 모이든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당신과 내가, 집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교통을 만지게 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한 일은 저주받아야 한다. 여러분 중에서 많은 분들이 나와 잘 알 뿐 아니라 매우 깊이 알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나와 다른 길을 간다면 나는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 이유는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영 안에서 주님을 경배하며 “주여, 저의 형제들이 오늘 이 길을 걸어가면서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저는 당신을 경배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특별히 형제들에게 부탁하건대, “여기 이 집회에 오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라는 말을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술수를 사용하여 사람을 다루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가라고 간절하게 사람을 권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생명의 교통을 만질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을 인도하여 우리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이며, 사람을 데리고 와서 우리를 만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교통을 만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사람들이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을 얻는 것을 보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사람의 인수만 증가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정중히 말한다. 한 면에서 인수의 증가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며 값진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는 생명의 교통을 만지는가에 달려 있다. 교회가 황폐할 때 중요한 것은 생명의 교통이다. 어디에 있는 사람들이든지 만약 당신이 그들과 교통이 되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만지고 공급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얻게 하고, 빛 비춤을 받게 하며, 구원받게 한다면, 당신은 그들과 교통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황폐함 가운데에서 걸어야 할 길이며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공과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 없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뿐만 아니라 교통 안에 사는 것을 배워 다른 사람이 교통 안에 있는가의 여부를 만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항상 생명의 교통 안에 산다면,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자연히 그들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도 분명히 우리에게서 공급을 얻게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 또한 다른 사람에게서 공급받는 것을 계속 배워야 한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공급을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에게서 공급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서로 생명의 교통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외면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안에 있는 생명의 이야기이다. 우리 스스로 배우게 될 때 어떻게 분별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교회의 발자취, 제 6장)


요한일서 1장 3절,천주교 황폐,교통 용납,후대 비천한,분열 유죄판결,저주 고통,술수 증가,빛비춤

트랙백:  수신불가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