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쟁-십자가로 돌아가라
영적전쟁
2009-10-08 , 조회 (32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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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십자가로 돌아가라

 

1장 십자가로 돌아가라      

 

우리는 은혜 시대의 끝 무렵에 있다. 시계 바늘은 이미 열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은 바로 깊은 밤이며 어둠의 시간이다. 이 극한 어려움이 지나면 날은 곧 밝아진다. 교회는 점점 더 배도의 상태로 떨어져 가고 있고 갈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 전쟁은 세상을 분란하게 했고 교회를 마비시켰다. 흑암의 권세가 이미 만연해져서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그 악영향을 받고 있다. 유럽의 전쟁은 교회가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남겨 주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현재 흑암 가운데 큰 빛을 발하고 있다. 죄는 우리로 길을 잃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되고 하나님께 드려졌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대신 죽으심의 참된 진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죄에 대한 풍부한 지각을 상실했다. 오직 십자가로 가는 사람만이 죄악의 깊음과 고통을 깨닫는다. 골고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싫증이 났음을 말해 준다. 이 싫증은 아주 어두운 죄악에 물든 행실 가운데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믿음의 표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복된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사람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므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는 표준이기도 하다. 교회가 죄의 사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미 죄악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빛에서 이탈되었다. 교회는 “내가 내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최근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교회의 죄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제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정말 사악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마음속에서 범한 죄이든, 생각 속에서 범한 죄이든, 연단에서 범한 죄이든, 예배당에 앉아서 범한 죄이든―를 범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골고다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골고다로 돌아가 죄인의 위치에 서라. 십자가 앞에서 죄를 회개하며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당신의 강퍅한 마음을 녹여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장소 

 

죄의 결과는 분리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이것을 진리적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 공과를 온전히 배우게 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이것은 그분께서 당한 육신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그분의 영성이 하나님과 분리될 때 나온 부르짖음이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아버지와 분리된 적이 없으셨다. 셀 수 없는 영원의 시대를 거치고도 그들은 하나이셨다. 이 복된 하나는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의 생명에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그분에게 그분에 대한 죄인들의 대항을 넉넉히 견디시게 하였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의 화목을 위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분리 곧 사악한 흑암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영의 분리를 견디시고 화목의 참 의의를 이루셨으며 그분의 죽음을 놀라운 것으로 만드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흑암에 버려지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당신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영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영이 우리를 적시고 바로 그 골고다의 법칙이 우리 생명 안에 세워지기까지, 주 예수님의 죽음의 이 방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화목을 위해 십자가로 나가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기 위해 주 예수님의 속죄하는 죽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주 신학적 용어로 냉담하게 ‘은혜’를 논하지만 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교통에 들어갈 때 비로소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것으로 변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유일한 방법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가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해 계속 전진해 나가려 할 때, 이제 십자가를 떠나도 되는가? ”라고 물어왔다.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 생명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더해져야 한다고 할 때 그들은, “그러나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 거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지 죽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주로 이 복된 진리를 영적 의미보다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그리스도의 영은 골고다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최고의 표시이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못 박힌 영은 우리 생명의 근본으로 변한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더 깊이 하나가 되기를 추구할 때 십자가를 떠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 깊이 하나가 되고자 할수록 주님의 죽음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빌 3:10).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과 그분 안에 산다는 것은 모두 당신이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승리하는 조건은 바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죄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주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믿는 이들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공과 중의 하나가 바로 범사에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없으면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없는 것같이 느낀다. 주님께서 죄인에게 주신 메시지는 “내게로 오라”이고, 믿는 이들에게 주신 메시지는 “내 안에 거하라”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그러나 이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며 주님 안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믿는 이는 주님과 완전한 접촉을 갖게 된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거듭남 혹은 새 생명에 관한 가르침을 깨닫는다. 첫째는 거듭남의 필요성(요 3:3)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그다음은 거듭남의 본질―영적인 본질 혹은 영적인 출생(요 3:5, 6)―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거듭나는 길은 곧 주님을 믿는 것(요 3:16)임을 보여 준다. 사실 ‘믿는’이라는 단어 앞에는 ‘안으로’가 있어서 주님 ‘안으로 믿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죄인에게는 아직 구주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골고다는 필수이다. 못 박힌 이 구주는 모든 사람을 그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요한복음 12장 32절과 33절을 보자.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사탄의 갈망은 믿는 이가 십자가를 멀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떠나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 된 생명을 추구하지 못하게 했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사탄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결코 참된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는 이들에게 거짓된 체험을 갖게 한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땅히 그분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바울은 또한 주님과 더 깊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의 더 깊은 연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는 이것이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 아닌 실제적인 체험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실제적인 체험의 결과는 능력 있는 생명 곧, 죄와 사탄과 질병과 사망과 세상을 이기는 생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십자가로 돌아가야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피를 우리 생명에 적용할 수 없다면 이것은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으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온전한 속죄를 위해 그 피를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죽음의 일의 전부가 아니다. 거기에 지속적인 죄의 씻음이 필요하다.


한번은 한 성도가 다음과 같은 난처한 질문을 해왔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죄를 자백한 때가 언제입니까?” 그때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가 그것에 대해 물었고, 나는 보혈이 자동적으로 내 죄를 씻는다고 잘못 믿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역시 나는 내가 범한 죄의 진상을 볼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오늘 여러분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겠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죄를 자백한 때가 언제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바로 죄악과 혈기의 생명의 활동이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성령을 떠나게 하고, 성령 안에서 행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영은 항상 이 악한 능력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힘을 다해 대적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영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고요함 속에서 행하지 못한다. 못 박히지 않은 이 악한 본성은 또한 사탄과 그의 악한 영이 일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로서 불쏘시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흑암의 권세와 자주 싸우는 원인이다. 또한 그들은 계속하여 우리의 ‘거점’을 공격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보혈을 적용하여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배웠을지라도 그들에게 ‘여지’를 남겨 둔다면 그들은 언젠가 기회를 잡아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치료제이다. 주님께 속한 사람은 누구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히 죄와 육체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의 죽음에 복종시켜야 하고, 항상 주 안에 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의 죽음의 유익을 함께 누리게 되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죄와 악한 본성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새 생명의 탁월함 안에서 행하게 된다. 로마서 8장 초반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롬 8:2)이라는 말씀이 있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 외에는 영적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이 연합은 죽음과 삶의 연합이다. 영적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멀리한다면 결과는 언제나 실패나 거짓된 것뿐이다.
성령은 바로 십자가의 영이다. 십자가는 성령의 최고의 표시이다.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씻음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씻음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이것은 크나큰 위험이다. 씻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죄는 범죄의 근원일 뿐 아니라 더러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죽음과 연합하는 기초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씻음을 구한다 하더라도 악한 본성은 여전히 우리를 더럽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직 씻음이 가져다주는 축복만을 알 뿐 그 씻음을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신성한 기초를 의지하기보다는 그들의 체험을 더욱 의지하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의 죽음만이 악한 본성의 활동을 저지시킬 수 있다. 믿는 이가 믿음을 통해 주님 안에 거할 때만이 주님의 죽음은 죄의 종노릇에서 그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되는 한 가지 문제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겼는데 또 무슨 씻음이 필요하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믿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당신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거나 깨어 있지 못함으로써 당신의 악한 본성에 순종하여 더럽혀졌다면 당신에게는 씻음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더러움이든 그것은 당신을 주님의 임재에서 떠나게 한다. 단지 마음속으로 “나는 주님의 죽음 안에 거하기 때문에 자유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를 범했다면 반드시 주님께 그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보혈의 씻음을 구해야 한다. 주님의 죽음은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이 보혈의 효능은 영원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붉은 암송아지로 예표되었다(민 19:2-22). 붉은 암송아지를 죽여 더러움이 있을 때 사용하도록 그 재만 남겨 두었다. 세상 죄인은 속죄를 위한 희생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여전히 이 희생의 ‘재’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주님의 희생도 이와 같다.


죄를 자백할 필요도 없고, 보혈의 씻음을 구할 필요도 없는 정도에까지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러움은 안에서 올 수 있는가 하면 밖에서도 올 수 있다. 우리는 세상과의 접촉으로 더럽혀질 수 있다. 우리가 들이마신 도덕적인 공기로도 우리는 오염될 수 있다. 생명 안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왕래하고 교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우리는 시편 24편 3절과 4절에서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혼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원문 참조).
‘손이 깨끗하며’는 우리가 사물을 만지는 것을 언급한다. 민수기 19장은 의도적으로든 부주의하게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의 시체를 만진 사람은 외면상 부정하게 되므로 구속받고 경배하는 무리와 끊어짐을 보여 준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더 깊은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생명을 위해 열심을 내신다는 것과 사람이 죄를 만지면(사상이든 사물이든) 하나님과의 교통을 상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가운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를 더럽히는 사물을 만진 적이 없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피 뿌림을 끊임없이 적용할 필요가 있다.


'청결한 마음’은 생명의 근원을 가리킨다(잠 4:23, 마 15:18-19). 우리에게 있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벧후 1:4, 원문 참조) 하심이다. 오직 신성한 본성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다. 믿는 이가 믿음을 사용하여 옛 본성을 십자가에 넘길 때만 이 신성한 본성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보혈로써 씻는 것과 상관없고 오직 못 박혀야만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 … 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악한 본성의 활동으로 생긴 더러움은 사람을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서 있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교통을 끊어 놓는다. 씻음은 이러한 더러움을 제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혼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혼은 자애(自愛)의 중추―교만, 곧 사람에게 드러나고 알려지며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나’―이다. 이것은 바로 흔히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말하는 영성의 교만이다. 영성의 교만은 가장 영적인 믿는 이의 마음속에 몰래 들어와서 그들을 더럽힌다. 이 영성의 교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과의 교통을 차단하고, 남의 일을 교정해 주기를 좋아하며, 남의 흠을 잡기를 좋아하는 영으로 성도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그들도 빛 가운데 거한다면 그들은 서로 교통을 하게 된다. 즉 그들이 성도들과 교통을 나눌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요일 1:8)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를 정죄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요일 1:9).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짓는 본성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씻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구원받은 죄인이 주님 앞에서 취할 자세는 바로 “내 죄를 시인합니다.”이다. 보혈을 믿는 믿음이 그를 위해 변호한 결과 그는 성도들과의 교통을 갖게 된다. 

 

사탄을 이기는 장소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더욱 우리의 영적인 원수인 사탄을 패배시키셨다. 이것은 골고다에서 그분께서 성취하신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왜냐하면 내적으로 사람이 죄의 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는 사탄이 그의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모른다면 죄와 싸우는 위치가 약화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골고다의 승리 안에서만 현재 더욱 강하게 활동하는 사탄의 권세를 대적할 수 있다. 사탄은 하늘로 향한 교회의 길에 이미 그 권력을 확장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왕 노릇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시기를 지연시켰다. 이 권력은 영에 속한 것이고 악한 것이므로 오직 영적 병기라야 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마귀가 교회를 실패하게 할 수는 있어도 “마귀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저지할 수 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기는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권세를 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서 주님과의 하나 됨을 통해 승리를 배우고 영 안에서 권세를 잡고 다스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속된 일로 점유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한 인식이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상당히 영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주 실패한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도 죄악의 권세를 대적할 전신갑주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귀가 그들의 일을 공격하고 그들을 혼미하게 할 때, 그들은 여전히 그 공격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항복하고 실패한다. 원수는 그들의 일을 방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명까지도 미워한다. 원수는 언제나 그들이 좌절하는 분위기로 떨어질 때까지 그들의 가정에 혼란과 분쟁과 오해가 끊이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일들이 그들의 체험에서 사실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가, 아니면 이러한 일들을 이기는가?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이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공격의 참 근원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사탄을 잊어버렸다. 그가 우리를 괴롭히는(소리 없이 교활하게) 근원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열려 이 원수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리 개개인이 흑암의 권세와 영적 전쟁을 하도록 부름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더 큰 안목으로 죄가 사람을 다스리는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탄은 교회를 반대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이다. 이러한 일들(앞에서 언급한 가정의 혼란 등)이 예사롭지 않고 사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해야만이 이러한 일들을 이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마귀와 그의 군대를 이길 수 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통해서 이길 수 있고, 골고다가 사탄이 완전히 패배한 곳임을 영 안에서 알 때 이길 수 있다. 원수는 얼마나 이 교리를 봉쇄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는 교활하여 얼마나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고 실패하게 하는지 모른다! 요한복음 12장 31절과 32절은 들리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사탄을 패배시킨 분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그분은 어디에서 들리셨는가? 보좌 위에서인가?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들리셨다. 33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골로새서 2장 15절을 읽어 보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로새서에서의 바울의 모든 이론은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승리하셨는데 우리가 원수의 권세에 순종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가? 


주님의 죽음은 사탄과 그의 군대를 완전히 진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이러한 승리가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로 돌아가 흑암의 권세, 곧 교활한 음모로 이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악한 영들을 대적하도록 십자가를 붙들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 가운데 서 있을 때 악한 영들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은 저지당하고 만다. 이것을 깨달은 성도는 그의 개인적인 전쟁이 전체 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마귀는 그의 최후의 전투에 가까이 오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하늘의 갑옷을 입으라. 입기를 배우라. 미숙한 신병이 되지 말고 노련한 군인이 되자. 
거짓 전쟁의 날은 이미 지나갔고 참된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신의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주님 안에 있는 당신은 그들보다 더욱 강하다. 원수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예수님의 상처받은 얼굴을 바라보라! 주님은 곧 영광 가운데서 가련하고 분란한 이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고 당신은 해와 같이 빛나는 주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워치만 니의 <영적 전쟁>, 제 1장 '십자가로 돌아가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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